
[새전북신문] 1976년 전주예수병원에서 인턴으로 첫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유신 말기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전 국민 의료보험은 요원하던 시절이었다. 1977년 500인 이상 대형 사업장부터 의료보험 제도가 첫발을 떼었지만, 대다수 서민에게 병원의 문턱은 여전히 높기만 했다.
당시 예수병원은 선교병원의 사명 아래 일찍이 의료사회사업실을 두고 지불 능력이 없는 극빈층 환자들에게 무료 진료와 감면 혜택을 베풀고자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개별 병원의 박애주의와 선의만으로 국가 안전망의 거대한 공백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사로서 마주한 현실은, 국가 책무의 부재 속에서 결국 환자의 ‘지불 능력’이 치료의 지속을 좌우한다는 구조적 한계였다. 병원비 앞에서 좌절하는 환자들을 보며 국민의 생명권 앞에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순은 1997년 서울대학교병원이 위탁 운영하던 서울시립 보라매병원에서 비극으로 폭발했다. 경제적 파탄으로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던 보호자의 완강한 퇴원 간청에 의료진은 서약서를 받고 환자를 귀가시켰으나 곧 숨을 거두었다. 사법부는 퇴원을 허락한 주치의와 전공의에게 ‘살인방조죄’라는 무거운 형벌을 선고했다. 극빈층을 위한 사회적 구호망도, 연명치료 중단 기준도 마련하지 않은 채 직무를 유기해 온 국가가 그 책임을 오롯이 현장 의사 개인에게 전가한 판결이었다. 이후 의료 현장에는 형사처벌을 피하기 위해 임종기 환자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기계적으로 이어가는 극단적 방어진료와 고통 연장이 일상화되었다.
법률 만능주의와 경직된 형벌주의의 폐해는 2000년 시행된 ‘장기이식법’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세계 어느 선진국을 둘러보아도 이식에 관한 개별 법률 내에 이처럼 구체적이고 가혹한 형법 조항들을 별도로 명시해 둔 나라는 찾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은 법률 자체에 징역형 등 무거운 처벌 규정과 복잡한 절차를 못 박았고, 그 결과 연간 160명을 웃돌던 뇌사자 장기기증은 법 시행 직후 30~60명 선으로 곤두박질쳤다. 제도의 경직성이 수많은 이식 대기 환자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비극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모순과 생명윤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2005년 대통령 직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출범하기 전부터 보건복지부(당시 혈액·장기 정책 부서) 차원의 생명윤리위원회가 꾸려져 활동했다. 당시 가톨릭계를 대표하던 이동익 신부 등과 함께 현장의 윤리적 기준을 세우고자 고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이어진 황우석 사태로 국가적 위원회가 긴급 개편되며 나는 이식윤리위원의 책무를 갑작스럽게 맡게 되었다. 당시 사회는 배아 복제와 줄기세포 등 첨단 공학 규제에만 매몰되어 사실상 ‘이식윤리가 곧 생명윤리의 전부’로 통용되던 왜곡된 시절이었다. 첨단 기술 통제에 역량이 집중되는 사이, 병상에서 매일 벌어지는 평범한 서민들의 존엄한 죽음과 연명의료의 한계에 대한 제도화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20년이 흐른 2018년에야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었다. 정년퇴임 후 진안군의료원장으로 부임하여 우리 의료원이 전북 지역 공공병원 중 가장 먼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으로 참여하고 절차를 선제적으로 수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청년 시절부터 목격한 제도의 부조리, 보라매병원의 비극, 장기이식법의 실패와 초기 생명윤리 논의의 격변기를 겪으며 환자의 존엄한 자기결정권이야말로 국가와 의료가 지켜내야 할 본질임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 마련된 연명의료결정법은 여전히 국가의 해태와 관료주의적 통제를 답습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의학적 판단과 환자의 의사에 앞서 임종 순간까지 물과 영양, 단순 산소 공급을 법률로 강제하며 중단을 금지한 입법례는 찾기 어렵다. 임종기 환자에게 강제 투여되는 수액과 영양이 오히려 폐부종과 호흡곤란 등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의학적 진실마저 법률의 도그마 아래 외면당하고 있다.
완화의료와 호스피스 인프라 구축 같은 국가의 실질적 책임은 방기한 채, 까다로운 서식과 엄격한 형사처벌 조항만을 앞세워 현장 의료진의 숨통을 죄고 있다. 치료비가 없어 퇴원을 애원하던 1970년대의 비극이나, 법률 만능주의 속에 방치된 오늘날의 생애 말기 의료 현장이나 본질은 같다. 국가가 감당해야 할 사회안전망 구축의 책무를 회피한 채 모든 윤리적 번민과 법적 위험을 의료인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관행은 반세기가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조백환(진안의료원장)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