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쓸 것인가를 알려주다니 고맙다

[책마주보기]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남자의 자리'(하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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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작가로 자처하는 자로서 쓰기에 대한 슬럼프가 거세다.

“AI가 쓸 건데 뭐 하러 글 쓴다고 애를 먹니?”

나는 최근에 의미의 미끄러짐을 보고 있었는데 이러한 세간의 인식으로 의미가 사라지는 것을 목도(目睹)하는 중이다.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언어는 생각이며, 생각이라는 행위가 의미를 생산하기 때문에 쓴다는 일은 인간이 지닌 인지적 부담감이 큰 창조의 과정이었다. 부담감은 이룬 후 성취감을 주었다. 그런데 AI 때문에 다시 묻고 있다. 쓰기에서 저자(author)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 쓰기를 어떻게 바꿀까?>의 저자 김성우 선생님은 저자란 4가지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첫째, 저작물의 고안 또는 설계, 또는 저작물을 위한 데이터의 획득, 분석 또는 해석에 대한 실질적인 기여를 하는 사람. 둘째, 저작물의 초안을 작성하거나 중요한 지적 내용에 대해 비판적으로 수정하는 일을 하는 사람. 셋째, 출판될 버전에 대한 최종 승인을 하는 사람. 넷째, 저작물의 정확성 또는 무결성과 관련된 문제가 적절히 조사되고 해결될 수 있도록 저작물의 모든 측면에 관한 책임을 진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는 국제의학학술지 편집인위원회의 저자 요건이라고 하면서 첫째와 둘째는 AI도 가능하지만 셋째와 넷째는 인간만 가능하다고 설명하였다. 즉 승인과 책임은 인간만이 하는 일인 것이다.

뭔가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자로써 어쩐지 불안이 좀 해소될 듯한 설명이었다. 김성우 선생님의 어린 시절의 추억과 세상과 사람에 대한 환대는 충분히 인간의 쓰기를 긍정하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모니터와 자판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누군가 작가 김애란이 손석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AI와 인간의 차이를 ‘머뭇거림’이라고 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인간만이 머뭇거리고 AI는 머뭇거리지 않는단다. 그러니까 나는 인간이라서 자판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고 괜찮은 것은 아니다. 그러다가 만난 작가가 아니 에르노이다.

아니 에르노(Annie Ernaux)는 이미 한국에 여러 권의 책이 번역되어 읽히는 중이다. <빈 옷장>, <부끄러움>, <한 여자>, <집착>, <탐닉>, <단순한 열정> 등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중 <남자의 자리>는 얇고 손에 잡히는 책이었는데 넘기는 순간 너무 놀랐다. “거기, 소설보다 더 큰 삶이 있다. 나의 아버지와 내가 떠나온 세계가 있다. 당신은 어떠한가? 소설보다 더 큰 무엇이 보이는가?” 삶이 먼저, 문학은 그다음이다.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 ‘아버지와 그의 인생에 대해 그리고 사춘기 시절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이 거리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었다. 계층 간의 거리나 이름이 없는 특별한 거리에 대해. 마치 이별한 사랑처럼(-본문 중에서)’.

모든 문장이 작가의 삶이다. 누가 문장을 기호이니 작위적으로 꾸며야 한다고 하였는가. 문장은 생각이고, 생각은 삶에서 나오며 어떻게 사느냐를 담는 그릇일 뿐이라고 에르노가 말해주었다.

가령 나는 아니 에르노가 보여준 메타픽션의 경지로 황홀하다. “하류라 여겨지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그에 따른 소회를 고발하는 일 사이에서 좁다란 길을 본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 행복하기도 했으며, 우리가 살던 환경의 수치스러운 장벽들(‘우리 집은 잘살지 못한다’라는 인식)이기도 했으니까. 행복이자 동시에 소외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이 모순 사이에서 흔들리는 느낌이다.” 흔들리는 느낌을 그대로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쓰기이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해 나가는 독보적인 글쓰기”(책을 소개하는 말). 아니 에르노(Ernaux)에게서 배운다. 오늘도 하나 배우고 가자.



하채현 작가는



군산대 인문도시센터 연구원

<한국문화콘텐츠와 테크니컬내러티브>의 저자

우석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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