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고산 한우는 19세기에도 인기

-고산현감 이인행의 '서천록(西遷錄)'에 기록 남아 - 1802년 가진 '난로회(煖爐會)' , 그 멤버는 고산현감 이인행, 전주판관 정지용, 고부군수 이방억, 금구현령 류상묵 등 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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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완주 고산 한우고기가 19세기부터 인기를 끌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전북 최초로 화로를 둘러앉아 소고기를 구워 먹는 전골 모임 '난로회(煖爐會)'가 등장, 눈길을 끈다.

그 멤버는 고산현감 이인행, 전주판관 정지용(鄭持容), 고부군수 이방억(李邦億), 금구현령 류상묵(柳相默) 등 4명이다.

이는 조선 후기의 문신 신야(新野) 이인행(李仁行, 1758~1833)의 유배일기 '서천록(西遷錄)'에 기록이 보인다.

그의 '신야선생문집(新野先生文集)' 권12와 권13에 수록, 영남 출신 지식인이 겪은 유배 경험과 당시의 사회상이 상세히 기록했다.

1802년 고산현감 시절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난로회 등 음식 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아직 국역이 안된 까닭에 필자가 일부를 한글로 옮겨본다.

'심문(參査)할 때의 일을 기억해 보니, 완판(完判, 전주 판관) 정지용(鄭持容), 고부군수(古阜守) 이방억(李邦億), 금구현령(金溝令) 류상묵(柳相默)이 난로회(煖爐會)를 개설하고, 기생들을 불러 모아 둘러앉았다. 내가 고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상중(喪)에 있는 사람들인데, 공당(公堂)에 기생을 데리고 와서 취하도록 먹고 마시는 것은 몹시 온당치 못합니다"라고 하니, 자리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모두 그렇다고 했다. 마침내 아양을 떠는 요염한 기생들을 물리치고 내보냈으나, 그들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없지 않았다'



但記參査時。完判鄭持容。古阜守李邦億。金溝令柳相默。爲設煖爐會。招聲妓圍坐。余告以吾輩俱是方喪之人。公堂携妓醉飫。甚涉未穩。同座皆曰然矣。遂罷去妖艷。而不無不悅之色



'난로회'는 조선 시대에 음력 10월 초하루(상달)가 되면 화로에 숯불을 피워놓고 석쇠를 올려 소고기를 구워 먹으며 풍류를 즐기던 겨울철 전통 모임이다.

이 기사는 전북 최초의 난로회 기사이며, 고산현 한우가 19세기에도 유명했음을 알리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그 맥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 것을 입증한다.

이 글의 화자는 자신을 포함, 모인 이들이 상례(喪禮)를 치르는 중이거나 공적인 집무 공간(公堂)임에도 불구하고, 지방관들이 기생을 불러 화려한 술자리를 벌인 것은 도리에 어긋나고 매우 부적절하다(甚涉未穩)고 지적하며 만류하고 있다.

이 때는 1802년 음력 2월 5일의 기록이다.

난로회가 고산현에서 있었다는 기록은 '신야선생문집 '권14 부록의 행장 류치명의 기록에도 보인다. 앞서 설명한 내용과 거의 같다.

관원들이 난로를 설치하고 기생을 불러 음식을 차려 대접 받고자 하니 공이 이를 불가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상을 당해 상복을 입고 있는 처지인데 공적인 대청에서 기생을 끼고 술에 취해 배를 불리하는 것은 도리상 편치 못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여 좌중에 있던 자들이 부끄러워하고 사과하며 기생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又欲設煖爐招妓供具。公不可曰。吾輩俱是方衰之人。公堂携妓醉飽。得非未安乎。座中愧謝却之。盖公素性剛介。不能詭隨。



따라서 난로회는 1회성이 아니었을 수도 있음을 추측케 하는 대목이다.

'이인행(李仁行)은 진사(進士)에 합격했고, 전생서판관(典牲署判官)으로 경인(庚寅) 8월 15일에 정령(政令)으로 본직(本職)에 제수됐다가 신유(辛酉) 6월 15일에 강등되어 파직됐다'

이는 '고산향교지(2010년 발간)' 875페이지의 기록이다.

이인행의 활동 시기로 볼 때, 경인년은 1790년, 1801년을 의미한다.

'고산지(高山誌, 1964년 발간)'는 연도가 약간 다르게 나온다.

'이인행은 진사 출신의 전생서판관(典牲署判官)이었으며, 경신년(1800년) 8월 15일에 고을 수령으로 임명되어 내려갔으나, 이듬해 신유년(1801년) 6월 15일 근무 성적 평가(포폄)에서 좋지 않은 점수를 받아 관직에서 파직됐다'

그는 고산현감(高山縣監)으로 있던 중 감사의 비위를 거슬러 체직되고, 위원에 유배됐다가 왕의 특명으로 풀려났다.

한편 그는 1802년 강세륜의 상소 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 위원과 장단 등으로 유배를 가게 됐다. 이 책은 그가 유배를 떠나게 된 경위부터 유배지로 이동하는 과정, 그리고 유배지에서의 고달픈 삶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유배지에서의 일상뿐만 아니라 현지의 풍속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평안도 위원 지역에서 냉면을 먹었던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시대 냉면의 역사적 변천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서천록' 6월 초이틀(음력 6월 2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냉면을 즐기는 것이 이 지방(위원)의 풍습이다. 메밀(교맥)로 국수를 만들고, 동치미(凍沈) 국물에 달콤한 초를 섞어 쓴다'

흔히 조선 시대 냉면은 겨울철(동치미를 얻기 쉬운 계절) 별미로 알려져 있지만, 이 기록은 한여름인 음력 6월에도 냉면을 즐겨 먹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당시 평안도 변방이었던 위원 지역에서 메밀로 면을 뽑고 동치미 국물에 식초를 섞어 냉면을 만들어 먹었던 구체적인 조리 방식과 풍습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한식 사료이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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