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한 인간의 초상

김스미의 미술산책 〈77〉 나혜석 ‘여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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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그림이나 문학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특히 인물에 대한 서사는 현실의 구체적인 소재의 신뢰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선수는 첫 문장만 읽어도 느낌이 오고 그림은 더욱 그렇다. 속임수나 그 어떤 눈가림으로 포장되어도 진실과 거리가 멀게 느껴질 때 관객은 외면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의 진솔한 시선이 보이는 작품은 시대를 넘어 명작이 된다.

나혜석(1896-1948)은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다, 그러나 그의 삶과 예술은 이런 수식어보다는 화가이자 문필가, 그리고 3.1 운동과 여성 해방을 주장한 사상가로서 근대라는 격동의 문턱에서 기존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한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나혜석의 작품은 한 개인의 창작 세계와 더불어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허용했던 삶의 범위를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

일본 유학으로 서양화를 배운 그는 귀국 후 화가로 활동하며 새로운 여성상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의 초기 작품은 인물화와 풍경화를 중심으로, 사실적인 묘사와 안정된 구도를 특징으로. 한국적 정서와 조용한 서정성이 깃들어 있다. 특히 자화상 속 그녀의 모습은 자기 존재를 세상에 선언하는 것처럼 단단한 시선이다.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는 당찬 표정은 그 시대 여성에게 기대되던 순종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나혜석의 ‘여인의 초상’은 근대적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응시한 작품이다. 어두운 배경에 검은 의상, 얼굴과 손은 비교적 밝게 그렸지만, 표정은 고독과 긴장이 감돈다. 특히 가지런히 포개진 손은 억제된 감정과 내면의 침묵을 상징하는 듯하다. 사실적인 인물 표현을 바탕으로 짙은 색조와 절제된 화면 구성이 인물의 심리적 깊이를 강조한다. 관람자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짙은 눈은 자기의 삶에 대한 정체성을 바라보려는 근대 여성의 자의식이 드러난다. 피카소의 입체주의에 영향받은 이 작품은 화가로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끊임없는 고뇌를 보여주는 나혜석의 내면 풍경이다.

‘김우영의 초상’은 근대적 초상화의 형식적 특징과 남편에 대한 나혜석의 시선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어두운 배경과 짙은 갈색·검은색 계열의 색채는 인물의 중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강조하지만 어쩐지 무겁고 온화함과는 거리가 멀다, 얼굴 명암을 세밀하게 표현하여 내면의 감정을 드러냈다. 특히 몸을 비스듬히 앉은 자세와 정면을 향한 시선은 안정감과 동시에 긴장감으로 숨이 턱 막힌다. 붉은 의자는 어두운 화면 속에서 강한 색채의 대비를 이루며 인물의 존재감을 부각한다. 이 초상은 서명이 없어서 미완성으로 해석되지만, 여성 화가의 시선으로 남성을 바라보고 재현한 근대적 회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나혜석의 회화는 담담하고 절제된 화면 속에서 인간의 심연을 조용히 응시한다. 이는 삶의 격랑을 겪은 이후 더욱 두드러진다. 마치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화면 속에 가라앉아 있는 듯한 인상이다.

말년의 나혜석은 사회적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화가로서의 활동도 제한되었다, 한때 시대의 선두에 서 있던 그는 무연고 행려병자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나혜석은 시대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질문을 너무 일찍 던진 사람이었다. 여성도 사랑하고 욕망하며 자기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그때 나혜석의 주장은, 결국 사회가 감당해야 할 미래의 과제였다./ 화가, 칼럼니스트 김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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