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남원에는 건물 한 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지만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절터가 있다. 남원시 왕정동에 자리한 만복사지(萬福寺址)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이라고 알고 처음 이곳을 찾는 이라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우리가 흔히 사찰이라고 하면 대웅전과 석탑, 범종 소리가 들리는 산사를 떠올리지만 이곳에는 옛 절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은 없고 넓은 터에 석조물 몇 점과 건물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 적다고 해서 그곳에 담긴 역사까지 적은 것은 아니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사찰이다. 정확한 창건 경위는 분명하지 않지만 남원 지역을 대표하는 대규모 사찰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절터에는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석조대좌, 석조여래입상, 당간지주, 석조인왕상 등이 남아 있고 발굴조사를 통해 여러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지금은 각각 떨어져 있는 석조물과 땅속의 흔적들이지만 하나씩 위치를 살펴보다 보면 과거 이곳에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이 또한 흥미로운 것은 문학작품 속에서도 그 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 생육신으로 알려진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의 「만복사저포기」는 이곳 만복사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양생이 만복사의 불전에서 부처와 저포놀이를 하고 한 여인을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며, 작품 속에는 불전과 행랑, 법당 등 당시 만복사의 공간을 짐작하게 하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물론 소설 속 묘사를 실제 건축물과 그대로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당시 사람들에게 만복사가 어떤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기록이다. 또한 1621년 조위한이 지은 고전소설 『최척전』에도 만복사와 장육금불 여러번 등장한다. 서로 다른 시기에 쓰인 문학작품에 만복사가 거듭 등장한다는 사실은 이곳이 오랫동안 남원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상징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는 많은 건물과 수많은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고 전한다. 사찰이 소실된 후 다시 옛 모습을 회복하지 못했고,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세가 기울고 건물은 사라지고 그 터만 남았다.
그래서 이곳을 제대로 보려면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오층석탑 하나만 보고 돌아서기보다는 주변에 남은 초석과 석축, 건물지를 함께 살펴보며 이곳에 어떤 건물이 있었고 사람들이 어떻게 오갔을지를 그려보는 것이다. 폐사지 답사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완성된 건축물을 감상하는 대신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사라진 공간을 읽어내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흔적만으로 과거의 모습을 그려보는 일은 일반 관람객에게 쉽지 않다. 절터 곳곳에 초석과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어도 이것이 어느 건물의 일부였는지, 건물은 어느 정도 규모였고 다른 건물과는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는지 알기는 어렵다.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전체적인 건물의 위치와 규모를 현재 남아 있는 유구와 연결해 보여주는 평면도나 가람배치도, 복원 추정도 등이 더해진다면 만복사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눈앞의 초석 하나가 수백년전 어느 건물의 기둥을 받치던 자리였음을 알게 되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돌과 절터의 풍경도 달리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폐사지는 문화유산 보존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문화유산의 가치가 반드시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라지고 남은 흔적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건물이 사라진 자리, 무너진 석축, 땅속에 남은 기단 하나도 과거의 공간과 생활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의 배치와 변화 과정을 밝히고 남아 있는 유구를 보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복사지는 천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창건과 번영, 소실과 폐사의 과정을 겪었다. 현재 그곳에서 화려했던 고려 사찰의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석탑과 불상 등 유구, 건물 흔적, 그리고 여러 문학기록까지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며 사라진 만복사의 이야기를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한편, 전북동부 문화유산돌봄센터는 국가유산청과 전북특별자치도청의 지원을 받아 도내 동부권역 8개 지역의 390개소 국가유산을 관리한다. 국가유산의 정기적인 상태 모니터링과 재질별 전문 모니터링, 경미한 수리와 일상적 관리를 통해 예방 보존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존 및 관람환경을 개선한다. /최유지(전북동부문화유산돌봄센터 모니터링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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