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창암(蒼巖) 박만환(朴晩煥, 1849-1926)이 정읍 영주정사에서 1907년 여성들의 전통적인 규범서 ‘여사서(女四書)’ 의 중간본을 정리한 책을 해오름한글서회에서 편역하고, 도서출판 다운샘에서 펴냈다.
이 책은 <여사서> 중간본 원전 전부와 궁체 필사본 정자체 및 흘림체를 함께 수록, 한 권으로 엮고, 현대문으로 읽기 쉽게 정리했다.
중간본은 초간본과 달리 한자음 없이 한문 원문을 싣고 그 뒤에 언해를 붙였으며 여계, 내훈, 여논어, 여범의 순서로 수록, 4권 2책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여계>에서는 여자가 출가하여 시부모와 남편을 섬기고 시가와의 화목을 위해 여자로서 해야 할 일체의 몸가짐을 제시했고, <내훈>에서는 언행, 효친, 혼례, 부부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 <여논어>에서는 가사, 대인관계, 윗사람 섬기는 일, 정조 등을 강조했으며, <여범>에서는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여사서』는 중국 청나라 때 왕상이 편집하고 주석을 달아 놓은 여성 대상 교훈서이다. 1907년에 박만환이 영주정사에서 언해하여 간행했다.
박만환은 1907년에 『여사서』를 언해, 전우에게 검증을 받았고, 송병순이 쓴 서문과 전우가 쓴 발문을 넣어 『여사서』를 펴냈다.
이 책의 맨뒤엔 간기가 나온다. ‘영주정사(瀛洲精舍) 정미간판(丁未刊板)’으로 기록됐다. 즉 1907년 영주정사에서 펴냈다는 의미이다.
이 책의 체제를 보면 한문 본문과 언해를 분리, 배치하여 중국판 『여사서』의 한문 본문과 주석을 그대로 싣고, 본문 또는 주석을 언해한 내용을 붙였다.
이는 영조 때 언해한 『여사서』에 한자의 음을 표기해주었던 방식과 다르다. 주석에 대해서는 주로 여성들의 모범적인 행적을 서술한 사례를 중심으로 했고, 여성의 행적과 관계없는 주석은 생략하고 언해하지 않았다.
특히 여성에 대한 교훈적인 내용, 여성이 지켜야 할 행동 규범 등의 내용이 많은 『여계(女誡))』, 『내훈(內訓)』, 『여논어(女論語)』의 주석은 전혀 언해하지 않았다. 반면 『여범첩록(女範捷錄)』은 여성들의 모범적 행실을 주석에 자세하게 설명한 바, 박만환은 이를 충실하게 언해했다.
이처럼 박만환은 여성들의 모범 사례 중심으로 『여사서』를 언해, 여성들이 모범으로 삼아 실제 실천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개화기에 여성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여성 대상 교훈서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박만환의 『여사서』 언해도 이러한 추세에 부응했다.
또, 여성도 국가 구성원으로서 규정되면서 국가 및 임금에 대한 여성들의 충의적(忠義的) 인식이나 태도가 중시됐다. 여성 교훈서에서도 이를 강조하는 추세였는데, 박만환도 『여사서』를 언해하면서 주석 내용 가운데 의나 예를 잘 지켰던 여성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언해를 했다. 박만환의 『여사서』 언해는 사회적으로 여성 교훈서 필요성에 부응하면서 여성들의 의식 확장을 해보고자 했던 의의가 있다.
정읍시 고부군에서 태어난 박만환 선생은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 독립운동 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한 천석꾼이자 유학자다.
영주정사는 조선 말기 유학자이자 천석꾼이었던 박만환이 흑암동에 세운 근대식 기숙형 강학 공간(서당)이다.
그는 130여 양반가 자제들을 교육하며 여성 교육에도 힘쓴 애국자이다. 정읍 영주정사와 영양사는 대한제국기에 세워진 교육기관이다. 영주정사는 창암 박만환이 1903년에 설립했고, 영양사는 1909년 지어졌다.
후학을 길러 국권 회복을 도모한다는 포부 아래 고향 마을에 영주정사(瀛洲精舍)를 짓는다. 정사는 학문을 가르치고, 정신을 수양하는 집이라는 뜻이고, 영주는 정사가 자리잡은 호남 명산 두승산의 다른 이름이다.
영주정사는 경학을 통해 국권 회복을 도모하려는 목적 아래 6년 동안 130명을 길러냈다. 당대 석학 간재 전우가 제자들을 지도했고, 창암은 사재를 털어 지원했다. 창암은 동학혁명에 이어 의병운동, 독립운동 자금을 비밀리에 지원한 천석꾼이었다.
영주정사에서 당대 석학 간재 전우(艮齋 田愚·1841~1922)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상당수가 국권 회복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창암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 1886년 통훈대부 행 의금부도사, 1890년 삼례 도찰방을 지냈고, 영광군수에 임명됐지만 사양하고, 향리인 정읍으로 낙향하였다. 창암은 기울어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교육에 힘써 후학을 양성하는데 있다고 믿었다.
창암과 간재는 전재 임헌회(全齋 任憲晦·1811~1876)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다. 3천석 부자였던 창암은 영주정사를 세운 뒤 1년에 300석 씩 출연. 모든 학생의 숙식을 책임졌다. 당시 영주정사에 들어가 공부하려는 자가 대기 순번을 기다리며 줄지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창암의 아들 금둔 박승규 역시 몸소 독립운동을 꾀했으며, 1919년 승동학원을 설립해 교육 구국에도 힘을 쏟았다. 영주정사와 승동학원은 대한제국기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를 상당수 길러냈다.
영주정사와 승동학원은 독립운동가를 상당수 길러냈으며, 영주정사는 유학 교육기관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관직을 그만둔 후 조선시대 어진화사(御眞畫師)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은 익산 금마면으로 낙향, ‘금마산방’을 열고 본격적인 상업화가로 활동한다. 이때 전북의 여러 항일 애국지사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많은 초상화를 남긴다. 1910년 국권이 찬탈된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여러 점의 항일지사 초상화를 그린다. 그 시작은 1910년 정읍의 부자이자 의금부도사를 지내고 항일운동에 자금을 제공한 ‘박만환 초상(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이다.
그는 만년에 손자 규영(奎榮)과 합작하기도 했다.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라는 공방(工房)을 정읍에 차려 놓고 광고를 내면서 초상화를 주문 제작에 나섰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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