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 1922-1944)’는 일제강점기 총독부 주최의 관전(官展) 미술제도였다. 이러한 주최 형식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즉 국전으로 이어지며 한국 근대미술의 제도적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조선미전은 단순히 근대미술의 발전을 이끈 공모전으로만 바라보기에는 복잡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3·1운동 이후 독립을 향한 조선의 민심을 돌리면서 안정된 식민통치를 위한 문화정책의 일환이었던 게 바로 조선미전이었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조선 미술의 진흥’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식민지 조선을 문화적으로 관리하려는 의도가 자리한 것이다.
당시 제대로 된 공적 미술교육기관이 거의 없었던 조선에서 양화가에게 조선미전은 특별했다. 조선미전은 작품을 발표하고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사실상 가장 중요한 등용문이었다. 제1회전에서는 고희동, 나혜석, 정규익이 입선했고, 이후 일본 유학이나 근대식 교육을 통해 양화를 배운 조선인 작가들이 차츰 등장했다. 전북은 1926년 제5회전에 손용주, 김용해가 입선하면서 지역 화단의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한편, 조선미전은 ‘조선인만의 전람회’가 아니었다. 조선에 6개월 이상 거주한 사람이면 출품할 수 있어서 일본인의 비중은 매우 높았다. 여기에 심사 또한 논란의 대상이었다. 심사위원은 도쿄미술학교 교수 등 일본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입상작은 이들의 미적 취향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전람회에서는 다수 입선한 인기 작가들이 등장했고, 이전 수상작과 비슷한 작품이 유행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심사 경향에 맞추어 작품을 제작하는 풍토가 형성된 것이다. 반면 관전풍이 아닌 신경향이나 사회현실, 전위적 작가들은 조선미전에서 인정받기 어려웠고 출품을 거부하는 작가도 나타났다. 결국 조선미전은 조선인들에게 근대적 미술 경험의 현장인 동시에, 일본 화단의 미적 기준을 조선에 이식하는 제도적 장치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조선미전의 입선작은 당시 조선 미술 전체를 대표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 화단에서 ‘입선작=당시 조선미술의 전부’라는 등식은 경계해야 한다. 조선미전은 분명 근대적 미술제도를 정착시키고 작가들에게 발표의 기회를 제공했으나 동시에 식민지 권력이 설정한 미적 기준안에서 특정한 화풍을 확산시키는 역할도 한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지역 미술을 살펴볼 때 더욱 중요하다. 다시 말해 조선미전은 근대미술의 중심 제도로 보이지만, 전북과 같은 지역에서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지역에서는 조선미전의 경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지역의 풍경과 생활을 중앙의 경향과 다른 화풍으로 실천하는 작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조선미전은 근대기 한국화단을 형성에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식민지 미술제도의 틀이었다. 작가들은 그 안에서 순응하기도 했고, 변형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거부하기도 했다. 전북의 화가들은 조선미전이라는 제도 속에서 일본에서 유입된 서양화법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지역적 풍경과 정서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조선미전의 역사를 지역의 시선에서 다시 읽는 일은 중앙 중심으로 서술되어 온 한국 근대미술사의 빈틈을 채우는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김미선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강의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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