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t의 원조 전북, 해외 박물관들, 박계담의 낙화(烙畵)', 낭곡 최석환의 포도 그림 소장

김수진 박사의 단행본 '수집된 한국'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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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박계담과 백학기의 낙화 그림과 낭곡 최석환의 포도 그림이 해외의 유수 미술관에 소장된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최근에 발간된 김수진 박사의 단행본'수집된 한국'이란 채자를 통해서이다.



△ 박계담, 근대 '낙화(烙畵)'의 부흥을 이끌다



박계담(朴桂淡, 1869~1948)은 밀양박씨 호계공파 11대손으로, 자는 원중(元仲), 호는 월산(月山)이다. 그는 조선 낙화를 개창한 박창규의 재종손이기도 하다. 조부 박이규(朴履珪, 1819~1859), 부친 박진호(朴鎭灝, 1842~?)에 이어 3대째 가업을 이었으며, 아들 박상전(朴相典, 1901~1959)까지 낙화가로 활동했다.

'낙화(烙畵)'는 '지질 낙'(烙)과 '그림 화'(畵)라는 한자에서 알 수 있듯 인두를 달궈 한지나 나무, 가죽 등 표면을 지지는 방식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19세기 중엽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낙화가가 출현하기에 이른다.

바로 박창규(朴昌珪,1796-1861)는 밀양 박씨 가문의 양반출신으로, 벼슬은 말단인 참봉을 지냈다. 자는 성민(聖玟)이고 호는 김석준의 시에 보듯 낭간(琅玕)이다. 수산(垂山) 혹은 화화도인(火畵道人)라고도 불린다. 본관은 함양이고, 전주, 임실 등 주로 전북에서 살았다.

박창규는 조선시대 낙화를 새롭게 변화시킨 작가다. 낙화장에 관한 기록은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낙화변중설(烙畵辨證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순조 말에 박창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낙화를 잘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원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가 살았던 곳은 현재 임실군 지사면 관기리라고 했다.

우리나라 제1의 ‘낙화(烙畵)’ 고장은 전북이었다. 박창규의 낙화는 그의 종제와 후손을 중심으로 150여 년 동안 전통과 기법을 전승시켜 왔다. 박창규의 직계로 둘째 아들 남계(南溪) 박진욱(朴鎭郁, 1833~?)와 증손인 석천(石川) 박상필(朴相珌, 1895~?)이 있다. 송암(松庵) 박이규(朴履珪, 1819~?)와 운초(雲樵) 박훈규(朴勛珪, 1836~?)를 비롯, 죽파(竹坡)박진호(朴鎭灝, 1842~?), 월산 박계담, 소산(小山) 박상전(朴相典, 1901~1959), 옥천(玉川)박상근(朴相根, 1907~?) 등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박계담은 18세 무렵부터 전라도 진안, 남원, 전주 등지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가 지역 화가를 넘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데는 진안 현감이었던 김승집(金升集, 1826~?)과 그의 동생인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의 도움이 컸다. 박계담의 명성은 국내를 넘어 일본과 구미 각지에서 낙화 주문이 밀려들 정도로 높아졌다.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 관련 기사에서는 그를 ‘낙화의 명인’이라 극찬했으며, 1929년 조선박람회 전라북도관에서는 그가 직접 낙화 제작을 시연, 대중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선교사의 수집된 '낙화(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 퍼시픽아시아박물관)' 작품은 1973년 거트루드 M. 바이러(Gertrude M. Byler, 1895~1975)에 의해 기증됐다. 바이러는 1895년 캔자스 태생으로 1975년 캔자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 바이러가 한국의 유물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까닭은 그녀가 1927년 미국연합감리교회(UMC) 소속 선교사로 일본에 부임, 36년 동안 일본 여성들의 선교와 교육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바이러는 퍼시픽아시아미술관에 일본 민속품과 미술품 수집 품을 기증했는데, 이 낙화는 그중 유일한 한국 유물이다. 이 작품은 조선 → 일본 → 미국이라는 경로를 따라 이동한 셈이다. 현해탄을 건넌 작품이 다시 미국인의 손을 거쳐 태평양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예술이 가진 질긴 생명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흔적브루클린미술관에도 그의 낙화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는 네 점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원래는 하나의 병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각각 연꽃, 국화, 도화, 난를 그렸는데 난초를 제외한 나머지에는 새가 앉아 있다. 보통 화조화를 그릴 때 새는 두 마리를 한 쌍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작품엔 유독 새가 한 마리씩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도화에는 꼬리가 유달리 길게 뻗은 수대조(壽帶鳥)가 앉아 있다. 작가는 자신의 이름과 호가 적힌 백문방인과 주문방인 두 과를 찍고 매 폭 '운포(雲浦)'라는 호를 남겼기 때문에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낙화 화가인 백학기(白鶴起)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매우 유사한 백학기의 작품이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도 전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 또한 꽃, 소나무, 대나무, 매화, 모란, 새 등을 낙화로 그린 10폭 병풍이다.

화면의 상단과 하단에 각기 '화화(火畵)'라 새겨진 나뭇잎 모양의 인장과 화제(畵題)가 있고, 화폭 하단에 '운포(雲浦)' 또는 '백운포(白雲浦)'라 쓰여 있다.

그 아래에는 브루클린미술관 소장본과 마찬가지로 백문방인과 주문방인이 찍혀 있다. 3폭의 난초, 6폭의 연꽃, 9폭의 국화는 브루클린미술관 본과 완전히 일치하는 구성을 보인다.

난초는 좌우가 바뀌어 있긴 하지만 연꽃과 국화는 새의 위치만 조금 다를 뿐 거의 같은 구성을 보여 백학기가 동일 초본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운포 백학기는 낙화 그림을 그린 작가의 계보 중에서도 가운데 시기에 자리한다. 박창규의 종형제와 자손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전승되던 낙화는 한때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다.

현재 많은 작품이 일본과 미국에 전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무렵이 되면 이 가문에서 전주 일대에서 키워낸 박남철(朴南喆)과 백학기가 그 명맥을 유지했다.

백학기는 그 출신과 활동 연대가 밀양 박씨가 아니면서도 현대 낙화 작가로 이어지는 계보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 화면 가로지르는 낭곡 최석환의 '덩굴의 힘'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소장 낭곡(浪谷) 최석환(崔奭煥, 1808~?)의 〈포도도〉는 수묵만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현재 확인되는 그의 작품은 산수, 화조, 영모 등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지만, 그중에서도 포도도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대부분의 포도도는 기본 도안이 크게 다르지 않으며, 절반 이상이 병풍 형식으로 제작됐다. 이 작품 역시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나무 기둥은 생략된 채 오른쪽 상단에서 시작된 포도 덩굴이 왼쪽 하단까지 힘차게 뻗어 내려온다.

'초룡(草龍)'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여덟 폭 화면을 가로지르는 덩굴의 움직임은 마치 용이 몸을 틀듯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포도 알갱이의 농담(濃淡) 표현과 덩굴의 유연한 붓질은 속도감 있게 화면에 살아 있다.

제발에는 “1870년 가을 국화가 필 때, 63세 최석환이 그리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최석환의 포도도는 각 폭을 독립적으로 구성하는 '각폭' 형식과 하나의 덩굴을 이어 그리는 '연폭' 형식이 공존한다. 이 작품은 후자에 해당한다. 연폭 병풍은 제작 과정에서 훨씬 높은 난도를 요구한다.

배첩 과정에서 화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처음 설계 단계부터 연결 부위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지방 화사였던 최석환 역시 그림뿐 아니라 장황까지 직접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소장 〈포도도 병풍〉 역시 최석환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은 오른쪽 세 번째 폭에서 시작된 가지가 좌우로 확장되며 병풍 전체를 채운다. 잎과 넝쿨이 풍성하게 얽힌 가운데 포도 알갱이들이 탐스럽게 맺혀 있다.

최석환은 평생 포도를 집중적으로 그린 화가였다. 병풍뿐 아니라 축, 화첩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제작했지만, 일관되게 수묵 포도를 고수했다. 보통 최석환의 작품들은 포도라는 화제는 유지되지만, 작품마다 다른 도안의 변주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최석환 작품의 다수가 연폭의 병풍을 잇대어 포도 덩굴을 수묵으로 초룡처럼 그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최석환의 포도도가 유사한 형식을 공유함에도, 현재까지 같은 구도가 반복된 작례는 없었다. 이는 초본을 활용한 일률적인 복제가 아니라, 일정한 틀 안에서의 변주였음을 의미한다.

퍼시픽아시아미술관에는 최석환의 〈묵포도도〉 단품이 소장되어 있다. 최석환 포도도의 백미는 병풍 형식에서 드러나는 덩굴의 흐름이지만, 이 작품은 절지형(折枝形) 구성을 취한다. 화면 크기와 구성으로 보아 처음부터 단품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유형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과 매우 유사하다. 진한 먹으로 포도 알갱이를 강조하고, 잎을 사방으로 흩어 배치, 화면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병풍에서처럼 넝쿨을 강조할 수 없는 대신, 사방으로 뻗은 잎사귀가 마치 그 생생한 기세와 생명력을 대신한 느낌이다. 화면 오른편에는 “當年若得傳方法, 博取凉州亦一奇: (포도가) 한창일 때 그것을 나눠줄 방법을 얻고자 하면, 양주(의 포도)를 얻어내는 것이 놀라운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시구가 보인다.

이는 원나라 때 활동했던 홍희문(洪希文)이 쓴 칠언 율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양주(凉州)는 중국 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를 칭하는데 이곳은 건조하고 일조량이 많아 포도 산지로 유명하다. 중국 한나라, 송나라, 원나라 때에는 포도를 읊은 시문에 양주가 언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포도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문화적·문학적 상징으로 소비되었음을 보여준다.

최석환이 남긴 포도도는 모두 채색이 없이 오직 먹의 농담만으로 탐스러운 포도 알갱이, 풍성한 포도 잎사귀, 생명력 넘치는 포도 덩굴을 표현하고 있다. 최석환의 작품은 이러한 포도 그림에 걸맞은 제시(題詩)가 곁들여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 시들은 대개 중국에서 포도를 읊은 시문의 일부를 가지고 온 경우가 많다.

최석환 스스로 시를 쓸만한 재능은 갖추지 못했던 때문인 것도 같지만, 수묵으로 그린 그림과 시는 하나의 쌍으로 어우러지며 최석환의 작품세계를 빛내고 있다.

보스턴미술관을 비롯,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 디트로이트미술관에도 최석환 계열의 포도도가 소장되어 있다. 특히 보스턴미술관 소장품은 낙관이 없지만, 필치와 도안에서 최석환의 영향이 뚜렷하다.

화면엔 다람쥐가 포도를 탐하는 장면 이추가되어 있어 시각적 흥미를 더한다. 수묵화임에도 포도도는 산수화나 사군자보다 훨씬 직관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풍성한 덩굴과 열매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구성 역시 시각적으로 강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점이 외국인 수집가들의 취향에 부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19세기 이후 서화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수묵 포도도가 해외에서도 특히 선호됐고, 그 결과 최석환의 작품이 다수 해외에 남겼다.



△ 최석환의 '묵포도도'



포도는 알알이 맺힌 열매, 넝쿨져 뻗어나가는 줄기의 속성으로 인해 ‘다산’과 ‘번창’을 상징하며 예로부터 시와 그림, 공예품에 애호됐다. 우리나라에서 포도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 에 처음 보이며 포도가 회화의 소재가 된 것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였다.

조선 말기에는 길상성과 장식성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인해 포도 그림의 수요가 증가하게 됐고, 그 가운데에는 낭곡 최석환이 있었다. 19세기에 활동한 최석환에 대한 기록은 옥구군 임피면(현 군산시 임피면)에 거주하며 포도를 잘 그렸다는 내용이 유일하다.

그러나 최석환은 1870년을 전후하여 많은 양의 포도병풍을 남겼다. ‘포도병풍(墨葡萄屛)’은 1870년 전후에 형성된 최석환 포도병풍의 전형 양식을 보여준다.

묵포도도의 거장인 그의 포도 그림은 관념에 머물지 않고 농담의 배합과 사실적인 관찰을 통해 포도 알알이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포도 그림은 관념에 머물지 않지 않는다. 농담의 배합과 사실적인 관찰을 통해 포도 알알이 생동감 넘치게 표현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는 포도 넝쿨 줄기를 가장 중요하게 표현했다. 포도 넝쿨의 힘찬 동세를 표현하기 위해 진한 먹으로 초서의 한 획처럼, 서예 기법으로 넝쿨을 그렸다. 포도알은 농묵과 담묵을 번갈아 채색, 알알이 표현했다.

병들어 상한 포도잎을 표현하는 등 더욱 사실적이고 자연스런 표현이 엿보인다. 이는 17세기에 활동했던 이계호(1574-1645 이후)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다.

포도 그림으로 당대에 최고의 이름을 떨쳤던 그는 포도그림으로도 유명하지만 산수화나 사군자 등 다른 분야의 그림에도 매우 빼어났던 화가다. 하지만 현재는 그의 가계와 활동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다만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전라도 임피에서 살았다는 기록만 전해질 뿐이다. 그래서인지 군산을 비롯, 전북 지역 곳곳에서는 그의 작품을 가끔씩 볼 수가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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