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문득, 산업의 쇠퇴와 지역 소멸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문화예술로 극복해 낸 곳. 공동체의 삶과 낡은 역사를 아카이빙하여 대체 불가능한 자산으로 만들어낸 일본의 작은 섬, 나오시마(直島)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일정을 내어 8월의 세토내해(瀬戸内海)를 가로지르는 페리에 올랐다. 여전히 따사로운 햇살과 짭조름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읽던 책 속에서, 파블로 네루다의 시구가 가만히 마음을 두드렸다.
“사랑은 너무나 짧고, 잊음은 너무나 길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문장이지만, 흩어지는 기억의 파편을 수집하는 아키비스트라면 그 낭만적인 탄식을 어쩌면 이렇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삶은 짧고, 기록은 길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우리는 종종 거대한 시간 앞에서 묘한 허무를 느낀다. 한 시절을 뜨겁게 달궜던 영광도, 번성했던 도시의 활기도 결국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스쳐 지나간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구리 제련소의 매연과 폐기물로 신음하던 나오시마 역시 그 허무한 궤적을 따라 잊힐 운명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섬은 서양인들조차 기꺼이 바다를 건너 찾아오는 세계적인 ‘예술의 성지’로 부활했다. 남겨진 기억의 잔해들을 주섬주섬 모아 공간에 쓸어 담은, 그 치열하고도 낭만적인 아카이빙 덕분이다.
섬을 거닐며 가장 경이로웠던 것은, 나오시마라는 공간 전체가 마치 숨을 쉬는 거대한 하나의 ‘오브제(Objet)’처럼 느껴졌다는 점이다. 사람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것은 화려한 건축물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사람 냄새 나는 삶’과 ‘관계’라는 사실을 이 섬은 잘 알고 있었다. 베네세(Benesse) 그룹과 지자체, 그리고 섬사람들이 오랜 시간 머리를 맞댄 민관 협력이 있었고, 지역 고유의 낡은 일상을 아름다운 ‘로컬리티(Locality)’로 담아낸 아카이빙이 그 든든한 뼈대가 되었다.
섬 한가운데 자리한 혼무라(本村) 지구의 ‘이에 프로젝트(Art House Project)’ 골목에 들어섰을 때, 나는 알라이다 아스만(Aleida Assmann)의 저서 『기억의 공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기억과 기록은 물리적 공간을 통해 비로소 전이되고 전승된다”고 통찰했다. 인구가 줄어 빈집이 되어버린 200년 된 낡은 가옥, 버려진 염전 창고, 잡초가 무성하던 신사를 현대미술로 개조한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갤러리가 아니다. 텅 빈 공간에 남겨진 옛사람들의 온기와 삶의 질감을 복원해 낸 낭만적 공간 아카이브다.
무엇보다 빛나는 것은 섬사람들의 일상 속에 스며든 ‘구술사(Oral History)’의 힘이다. 처음엔 낯선 현대미술을 경계하던 노인들이 점차 마음을 열고, 어느새 작품의 도슨트가 되어 방문객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예술을 가꾸며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켜 온 눈에 보이지 않는 공동체의 기억들. 그 생생한 목소리와 일상의 궤적이 차곡차곡 축적되면서, 나오시마는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거대한 삶의 수장고가 되었다.
아를레트 파르주(Arlette Farge)가 『아카이브 취향』에서 짚어냈듯, 기록은 결코 차갑고 객관적인 공문서 더미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 고심하는 사람들의 지극히 사적인 ‘취향’이 스며든 결과물이다. 낡은 집을 허무는 대신 그 안의 기억을 보듬기로 택한 섬사람들의 낭만적인 취향이, 나오시마를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공간으로 완성한 것이다.
삶은 유한하고, 우리가 스쳐 가는 공간의 풍경도 필연적으로 모습을 바꾼다. 하지만 나오시마의 눈부신 여름날이 보여주듯, 공간에 기억을 단단히 새기고 공동체의 숨결을 기록으로 덧대는 순간, 덧없이 흘러가던 시간은 놀랍도록 풍성한 질감을 지닌 채 다시 호흡하기 시작한다.
남원으로 돌아와, 8월의 짙은 녹음이 내려앉은 요천변과 구도심의 골목길을 가만히 걸어본다. 무심코 스쳐 지나갈 뻔했던 평범한 오후의 풍경이나, 소멸해 가는 낡은 공간들 속에서 반짝이는 낭만을 찾아내는 일. 남원만이 지닌 매력적인 ‘로컬리티’ 역시 이 다정하고 섬세한 시선에서 싹을 틔울 것이다.
삶은 짧고 속절없지만, 우리가 공간에 덧입힌 사적인 취향과 위대한 기록은 시공간을 넘어 무한히 길게 이어질 테니 말이다.
/남원시 기록연구사 권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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