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봉안차 태조어진, 한양에서 1년 6개월 동안 임시 머물다

김철배, ‘경기전 태조어진 6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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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곳이다. 전주한옥마을에 있는 핫플레이스 중의 하나이다. 경기전과 전동성당, 풍남문, 천양정, 오목대, 이목대, 전주향교 등 역사적 공간과 다양한 문화시설이 즐비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됐다.

'경기전 태조어진 600년(지은이 김철배, 펴낸 곳 부크크)'은 조선 건국자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 즉 태조어진이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에 봉안할 때부터 현재까지 약 600여 년의 역사를 스토리텔링했다. 태조 4대조의 전주로부터 이거를 시작으로 태조어진의 전주 봉안, 조선 초기 태조진전의 건립과 세종대 존치의 전말, 경기전 태조어진이 조선시대 500년 동안 두 번의 모사와 세 번의 봉안에 얽힌 이야기, 태조어진의 임진왜란기 피난과 그 대책으로 이루어진 위봉산성의 축성 및 행궁의 조성, 그리고 경기전과 태조어진의 보존을 위해 노력한 경기전 사람들의 이야기로 구성했다.

전주봉안차 태조어진이 한양에서 1년 6개월 동안 임시 머물렀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태종실록』, 태종 9년(1409) 2월 17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경상도 도관찰사 이원(李原)이 계림(鷄林)에서 태조(太祖)의 진용(眞容)을 받들고 도착하였다. 각사(各司)의 관원(官員) 1원(員)이 숭례문 밖에서 맞이하여, 계성전(啓聖殿)에 임시로 안치하였다. 처음에 완산부(完山府)에서 태조어진(太祖御眞) 봉안하기를 요청한 까닭에, 서울로 모셔와서 모사하도록 명한 것이었다[『태종실록』, 태종 9년(1409) 2월 17일]'



완산이 전주의 별칭인 것처럼 계림은 경주의 별칭이다. 위의 내용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가 죽은 후 1년이 지난 1409년 전주에서 태조의 초상을 봉안해 달라는 요청[請]을 하였고, 태종은 전주 봉안차 태조어진을 모사하기 위하여 경주의 태조어진을 한양으로 올려 모사할 것을 명[命]했다. 그리고 경주의 태조어진은 같은 해(1409) 3월 15일 경주로 돌아갔고, 전주 봉안차 태조어진은 이듬해인 태종 10년(1410) 9월 28일 완산부에 봉안됐다.



'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을 보내어 태조의 진용(眞容)을 완산부에 봉안했다.[『태종실록』, 태종 10년(1410) 9월 28일(임진)]'

이것이 경기전 및 태조어진 대서사의 시작이다.

경주의 태조어진은 태조 7년(1398) 3월 6일 경주에 봉안되었다. 이보다 몇 일 앞서 봉안된 함흥의 태조어진은 같은 시기에 같은 목적을 가지고 도사(圖寫)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함흥과 경주에 태조어진을 봉안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대학사(大學士) 성석린(成石璘)을 보내어 임금의 진영(眞影)을 함주(咸州)의 준원전(濬源殿)에 봉안하였다.[『태조실록』, 태조 7년(1398) 2월 26일(계묘)]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를 보내어 임금의 진영(眞影)을 계림부(鷄林府)에 봉안(奉安)하였다. 임금이 유후사(留後司)에서 형조전서(刑曹典書) 이귀령(李貴齡) 등에게 명하여 일을 보게 했다[『태조실록』, 태조 7년(1398) 3월 6일(계축)]'



『태조실록』과 『태종실록』엔 함흥과 경주의 태조어진 봉안 기록은 있으나 도사의 목적이나 도사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와 달리 전주의 태조어진은 모사의 배경으로 완산부에서 요청했다는 사실과 태종이 이를 명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모본이 된 경주의 태조어진은 1398년 3월 봉안된 태조어진이란 것, 경주 태조어진이 한양에 머문 기간은 1409년 2월 17일부터 경주로 떠난 3월 15일 사이, 즉 약 26일이며, 그사이에 모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전주 봉안차 태조어진은 이듬해 9월 28일까지 한양의 궁성 안 적당한 곳에서 약 1년 6개월간 임시 봉안되었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은이는 2010년 경기전 600년을 기념, 《경기전 참배의 중심에 서다》라는 단행본을 냈었다. 벌써 10여 년이 훌쩍 지났다. 그사이 어진박물관이 새롭게 조성되어 풍부한 문화콘텐츠를 제공하고 있고, 태조어진 봉안행치는 전주의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필자는 여러 역할을 수행했지만 점차 글을 쓰는 짓은 멈추지 않았다.

지은이는 "논문을 쓴다거나 지역문화유산을 정리한다거나 지역별 군지나 면지를 쓰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야 《경기전 태조어진 600년》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냈다"면서 "세 번의 봉안과 두 번의 모사, 임진왜란 당시 피난, 위봉산성 행궁 조성과 동학농민혁명 당시 피난 이야기 등등을 두루 섭렵할 수 있을 터이다"고 했다.

지은이는 전북대학교 사학과에서 한국 최초 조선시대 경기전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연구성과로 국역 태조영정모사도감의궤, 국역 태조어진 이모도감의궤, 국역 고산지(공저), 국역 홍재일기(공저), 국역 운수지 을묘본, 국역 전주부사(공저) 등 다양한 번역서가 있으며, 조선초기 태조진전 건립과 존치-경 체제와 의례정비를 중심으로, 임진왜란기 경주 집경전 태조어진 피난 경로 고찰, 임실 진구사지 삼층석탑의 조선시대 존재양태 및 복원 검토, 조선후기 격포행궁 조성과 변천 연구, 숙종대 전라도 위봉산성축성과 행궁의 위치 고찰 등 다수의 연구논문이 있다. 현재 임실군청 문화유산팀장 및 학예연구사로 활동하고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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