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여름의 심장이 가장 뜨겁게 고동치는 팔월이 오면, 마당가 담벼락 밑은 붉은 봉숭아 꽃 들로 가득한 서정의 영토가 된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 흙먼지를 뒤 집어 쓰고도, 제 안의 붉은 피를 남김없이 뿜어내는 그 꽃들을 보면 문득 생의 가장 순수했던 허기가 도지곤 한다. 이제는 기억의 박물관에나 박제되었을 법한 고전적인 풍경이지만, 내 마음의 행로(行路)는 팔월만 되면 어김없이 그 붉은 꽃그늘 아래로 수렴된다.
어릴 적 가을을 마중 가듯 손톱 위에 봉숭아 꽃잎을 찧어 올리던 밤이 있었다. 어머니는 백반(白礬) 대신 할머니의 단지에서 꺼낸 굵은 천일염 몇 알을 꽃잎과 함께 절구에 넣고 찧어주셨다. 소금은 꽃의 핏빛을 더 선명하게 고정하는 매염제(媒染劑)였지만, 어린 내 눈에는 그 짠 모래알 갚은 소금이 붉은 순수에 부여 하는 일종의 엄숙한 의식처럼 보였다. 첫눈이 올 때까지 이 붉은 낙인이 지워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그 아득한 설화를 온전히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생의 한가운데를 지나며 문득 거칠어진 손을 들여다본다. 손톱 끝에 머물던 그 서정의 불꽃은 진즉에 모두 휘발되고, 지금은 삶의 치열한 영수증 같은 굳은살만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토록 영악해진 것일까.
첫눈을 기다리며 손가락을 굽혀 쥐던 그 지극한 정성과 기다림의 감각을 상실한 채, 이제는 눈에 보이는 즉각적인 성과와 효율의 속도만을 숭배하며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 폰 화면을 문지르는 손가락에선 더 이상 계절의 냄새도, 기다림의 떨림도 배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문득 깨닫는다. 내영혼의 한구석에는 여전히 어린 시절 어머니가 쳐주었던 ‘소금 한 뼈, 만큼의 염도(鹽度)가 남아있음을. 세상의 풍파에 씻겨 삶이 아무리 싱겁고 비루해질지라도, 영혼이 완전히 부패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최소한의 방부제. 그것은 바로 팔월의 마당가에서 배웠던 순수에 대한 동경이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끝까지 믿어보려 했던 미련한 기다림의 힘이었다. 첫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으나, 그 기다림의 비린내를 앓아본 사람만이 삶의 시린 계절을 건너갈 내성(耐性)을 얻어낸다.
신문 가판대 위에는 매일같이 세상의 거칠고 메마른 언어들이 넘쳐나지만, 이 팔월에는 우리들의 가슴에 작은 꽃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싶다.
우리의 손톱은 비록 하얗게 바랬을지라도, 가슴속 깊은 곳에 흘러든 영혼의 손톱위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붉은 반점이 남아있기를 바란다.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다시 옷을 갈아입겠지만, 내 안의 팔월은 여전히 소금기 가득한 눈물겹도록 붉은 빛깔이다.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나는 오늘 밤 내 마음의 가장 연약한 살결 위에 다시 한번 뜨거운 봉숭아 꽃잎을 찧어 올린다. 첫눈이 올 때까지, 아니 생의 마지막 겨울이 당도할 때까지 결코 퇴색되지 않을 그 순수의 약속을 믿으면서.
이종순 수필가는
'문예사조'로 수필 등단, '시조문학'으로 시조시인 등단
문학박사. 우석대학교 대학원 외래교수
한국국보문학 시조부문 대상 수상
교육부 유보통합 연구진 교육부장관상 수상
'창의 숲 연구소'와 '아이가 크는 숲' 대표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