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역사를 새롭게 조망하다

박준서, '중국 사서(史書)로 보는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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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중국 사서(史書)로 보는 고구려(지은이 박준서, 펴낸 곳 간디서원)'는 고구려 역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책이다.

우리나라는 한사군 설치 이후에 중국 문물의 영향을 받아 문명화가 진행되었고,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고대국가가 건국되었다는 게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고조선과 부여 문명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을지언정 모든 정치 문화 제도가 중국 문명과 전혀 다르고, 남송시대의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앞선 독자적인 천문도를 가진 천자국이었다(〈천상열차분야지도〉)고 한다.

『삼국사기』는 사론(史論)에서 진(秦, BC 221년 건국) 한(漢, BC 206년 건국) 시대부터 고구려가 존재했었으며, 『책부원귀』는 한(漢) 건국 초 고구려 추모왕(鄒牟王)이 죽었다고 하고, ③당(唐)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의 말처럼, 당나라는 고구려 역사가 900년이라고 널리 알고 있었다.(④『삼국지』 및 『후한서』에도 확인됨) 그러므로 고구려 건국은 BC 232년에서 BC 107년 사이로 추정되며, 추모왕의 즉위 간지가 갑신년이므로 BC 217년(885년)이 가장 유력하다는 주장이다.

지은이는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면, 『삼국사기』와 달리 광개토대왕을 12세손이 아닌 17세손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왕 계보를 가장 앞서 기록한 『위서』(魏書)에도 주몽(朱蒙), 여달(閭達), 여율(閭栗), 막래로(莫來) 4대가 이어진다는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요동(遼東)과 낙랑(樂浪)은 본래 고조선 강역으로 우리 고대사의 중심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사에서도 핵심 강역이었다. 그 이유는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왕검성(王儉城) 및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이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요동과 낙랑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위만조선 멸망 이후 고구려는 한나라에 빼앗긴 요동 지역의 패권을 놓고 남방 농경 세력의 대표 주자인 한족(漢族)뿐만 아니라 북방 유목 세력의 대표 주자인 선비족과 수없이 전쟁을 벌이게 된다. 마침내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한 이후 요동은 고구려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였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와 『삼국사기』 일식 기록을 연구한 박창범 교수는 당시 별자리와 일식을 관찰했던 최적지를 밝혀내 고구려 초기 왕도 위치를 비정했다.

먼저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의 중앙부 별들의 최척의 관측지는 한반도 서울이었으나 바깥 지역 별들은 기원 전후 고구려 초기 별자리로 관측되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초기 왕도는 위도 39°~40° 범위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둘째 『삼국사기』 일식 기록은 일식을 볼 수 있는 지역이 늘 같은 지역으로 나왔으므로, 삼국이 각각의 왕도에서 꾸준하게 관측한 실측자료임을 뜻한다. 그런데 관측의 정확성을 위해 일식의 실현율을 연구한 결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일식 기록은 모두 평균 80%의 높은 실현율을 보인 반면 중국 사서는 가장 높을 때가 78%이고 낮을 때는 63~75%로 나왔으며, 일본 사서는 950년 이전 기록은 33%〜35.2%이고 950년에서 1550년 사이에는 실현율이 72.5%였다.

셋째 2~3세기 고구려는 하북성 북쪽과 내몽골지역이었고, 백제의 관측 위치는 발해만 유역이었다. 반면 201년 이전 상대(上代) 신라의 일식 최적 관측지는 장강(長江) 유역이었으나 787년 이후 하대(下代) 신라는 한반도 남부였다.

넷째 이는 삼국 모두 일식의 최적 관측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이었음을 시사하며, 삼국의 왕도 또한 마찬가지로 중국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고 했다.

『삼국사기』 일식 기록은 삼국이 각각 독자적으로 관측하여 나온 자료이며, 우리 사서 기록이 중국과 일본보다 더 과학적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요동성은 어디인가? 요동성은 한나라의 양평성이고 낙랑군 수성현이며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이다.

『자치통감』에서 고구려 요동성은 한나라 때 양평성이었는데, 전국시대 연(燕)나라 때는 무수현(武遂縣)이었다. 『사기』 흉노열전에서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를 물리치고 장성을 쌓을 때는 양평이라 했는데, 진(秦)나라 몽염(蒙恬) 장군이 다시 장성을 이어 쌓을 때는 장성이 일어난 곳이란 뜻으로 수성현이라 불리었다.

이후 한무제는 요동군 양평성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귀속시켰으며, 『후한서』 군국지에서는 요동군 양평현이라 했다. 고구려가 요동을 수복한 후에는 양평현은 요동성이 되었으며 고구려 최대의 성이 되었다. 곧 양평현 즉 수성현은 지금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鎭)이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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