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전주의 오랜 골목과 고요한 연못가에는 여름이기에 만날 수 있는 찬란한 꽃들이 피어난다. 초록빛 잎사귀 사이로 쏟아지는 주홍빛 능소화, 진흙 속에서 깨어나는 단아한 연꽃, 그리고 백 일 동안 자리를 지키는 진분홍빛 배롱나무가 그렇다.이 꽃들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뜨거운 계절을 건너는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설렘의 감성을 건넨다.
전주에서 여름철 붉은 배롱나무 꽃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명소는 전주향교 대성전과 완산칠봉 자락의 정혜사, 숲정이 성지이다. 7~8월 여름철에 분홍빛 백일홍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장소이다. 전주의 서원이나 고택 마당 한구석,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고건축의 처마선과 배롱나무의 구불구불한 줄기, 그리고 화사한 진분홍 꽃송이의 조화를 감상해 본다.
배롱나무꽃은 나무일까 꽃일까? 배롱나무와 백일홍은 백일 동안 붉은 꽃이 핀다는 뜻에서 이름이 비슷하다. 하지만 배롱나무는 여러 해 동안 사는 나무(목본)이고, 백일홍은 한 해만 사는 풀(초본)이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배롱나무를 줄여서 '목백일홍' 또는 '백일홍나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혼동하기 쉽다.
김제 귀신사의 여름 풍경은 대적광전의 고즈넉한 기와지붕과 마당 주변으로 피어나는 붉은 진분홍빛 배롱나무꽃이 어우러져 선명하고 아름다운 대비를 이룬다. 7월부터 9월까지 이어지는 이 시기에는 천년 고찰의 전통적인 곡선미와 화려한 백일홍 꽃이 조화를 이루어 깊은 서정성과 수려한 풍경을 자아낸다 여름철 귀신사는 대적광전 앞마당에 피어나는 배롱나무꽃으로 붉게 물든다.
전북특별자치도의 상징 꽃(도화)인 백일홍에 얽힌 전설은 이무기를 퇴치한 장수와 처녀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바닷가 마을에 나타난 이무기를 물리친 청년이 촌장의 딸과 100일 뒤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떠난다. 청년을 그리워하던 처녀가 100일째 되는 날 병으로 죽고, 돌아온 왕자(청년)가 무덤가에 나무를 심었는데 이 나무가 백일 동안 붉게 피는 백일홍이 됐다.
고창의 백일홍 3경을 꼽으라면, 효감천, 선운사, 덕천사 삼호정을 꼽는다. 선운사 만세루 옆으로 조금만 눈길을 돌리면 진한 분홍색을 뽐내는 배롱나무 꽃이 만개했다. 고창 상원사 배롱나무, 고창 덕천사 배롱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고창 방장산 아래 오래된 고찰이 있다 상원사라는 사찰인데 백제 성왕 때 건립되었다고 하니 정말 오래된 사찰이다. 이곳엔 딱 한그루의 배롱나무가 있다. 상원사에서 선운사 쪽으로 조금 이동하면 아산면에 덕천사라는 사당이 있다. 이곳 삼호정 역시 옛 문인들을 모시는 곳이다. 잠시 들러 배롱나무 꽃을 구경하고 나왔다.
조선시대 효행 이야기로 전국을 울리던 고창 효자 오준의 효감천과 창효사를 참배한다. 효감천을 장식한 배롱나무에 붉은 백일홍이 여름 하늘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열흘가기 힘든 게 꽃이라는데, 백일홍이 백일가는 비결은 매일 거듭나고 있다. 날마다 살을 깍는 자기 혁신을 하여, 매일 떨어지는 꽃보다 많은 꽃망울을 끊임없이 만드는 게 비결이다.
안타깝게도 세상사,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는 뜻으로, 한 번 성한 것이 쇠하여지거나 권력·청춘 등이 영원하지 않고 잠시뿐임을 이르는 말이다. 권력자는 알량한 힘을 믿고 까불지 말고 역사앞에 겸허해야 한다. 가끔은 뒤돌아보고 내려와 보면, 좌우상하가 바뀌는 법을 볼 수 있다. 오늘, 백 일의 뜨거운 열정을 품은 진분홍빛 고백과 사연을 생각해본다./이종근(문화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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