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선사와 서예가 이삼만, ‘호남칠고붕(湖南七高朋)’ 멤버였다

국립광주박물관, 박동춘 기증 ‘초의선사 유묵 번역집4’ 발간 ‘호남칠고붕’은 이삼만, 노질, 이학전, 김각, 심두영, 초의스님, 해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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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선승(禪僧)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와 서예가 창암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 ‘호남칠고붕(湖南七高朋)’의 멤버로 활동했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립광주박물관이 펴낸 박동춘 기증 ‘초의선사 유묵 번역집4’을 통해 이같은 사실이 확인됐다.

1842년, 창암 이삼만이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속 시에는 이미 칠고봉 중에 ‘나와 초의와 운와(雲窩)가 남았다'고 했으니 이 또한 초의선사의 교유사 연구에 빠질 수 없는 자료다.



증별남해승초의(贈別南海僧草衣)



草衣 曾是七友中一也 七去其四 惟庵及草衣雲臥臥在 獨十餘年得見於雲臥席上 情感未洽 旋歸故山 白首臨別 悵惘難寐 因感喧一絶



초의(草衣)는 일찍부터 일곱 벗 중 하나다. 일곱 중 넷이 가고, 나와 초의와 운와(雲臥)가 남았다. 십여 년 만에 운와의 자리에서 만났다가, 정의에 흡족하기도 전에 금새 고향 산에 돌아간다. 늙은 막에 작별을 앞두고 훗날을 기약하기도 어려워, 감회를 절구 한 수로 읊어 준다.



초의가 어찌하여 벽라의(碧蘿衣)와 같은가

구름에 싸인 푸른 산에 스님의 집이 있지

우연히 참된 인연 얻어 내게 와서 자고

어찌 도로 고향 산으로 돌아간다고 하는가



草衣何似碧蘿衣

雲掩靑山釋子廬

偶得宿緣來我宿

如何進道故山歸



壬寅冬 完山 李三晩 蒼巖 稿



임인년(1842), 겨울 완산(完山) 이삼만(李三晩) 창암(蒼巖)이 쓰다.

전북 출신 창암 이삼만은 스스로 서예의 일가를 이루었으며 후학들에게 서법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해서(楷書) 등 모든 글씨를 잘 썼고 특히 흐르는 물과 같은 유수체(流水體)는 그의 대표적인 서체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삼만은 글자를 흘려 쓰는 초서(草書)에도 능통했다.

호남칠고붕(湖南七高朋)은 당대 호남 지역에서 신분과 계층을 초월하여 깊은 우정을 나눈 일곱 명의 높은 벗(칠고붕) 중 한 사람이다.

‘호남칠고붕’은 노질(盧質)과 이학전(李學傳), 함양 사람 김각(金珏), 곡성사람 홍교 심두영(汞橋 沈斗永), 전주출신 이삼만(李三晩1770~1847), 대흥사 승려 초의(草衣)스님, 선암사 승려 해붕(海鵬 ?~1826) 스님 등이다.

‘호남칠고붕’은 대부분 호남지역에 거주했던 인물로, 선비와 승려들로 구성됐다. 홍교 심두영은 곡성 출신으로 진사시에 합격했고, 곡성에 대환정(大還亭)을 지었으며 당대 문인으로 이름 높았던 이만용(李晩用)과 교유했고 성재 조병현(成齋趙秉鉉1791~1849)와도 교유했다.

김각은 함양출신으로, 조선 후기 호남지역의 선비였다. 그는 선암사와 대흥사에서 수행했던 해붕선사(海鵬禪師)와 초의선사, 그리고 호의(縞衣)스님뿐 아니라 이들의 제자와도 교유했다.

원래 그는 도가의 태식법에 밝았던 인물로 알려졌으나 대흥사 승려들과의 교유를 통해 불교뿐 아니라 차에도 관심이 컸던 듯하다. 그의 자(字)는 태화(太和)이며, 호(號)는 운엄, 운관(雲館), 운와(雲臥), 운옹(雲翁), 운암거사(雲巖居士)라 불렀다. 지금까지 드러난 김각에 관한 자료는 초의선사의 '일지암시고(一枝菴詩稿)'와 범해스님의 '범해선사유고(梵海禪師遺稿)'가 있고, 친필본 자료인 '운관시축(雲館詩軸)'이 있다.

그가 호남칠고붕(湖南七高朋)이었다는 사실은 범해스님의 시초(詩抄)를 통해 밝혀졌다.

이런 사실은 그가 을해년(1815)에 묘군 경성(卯君景成)과 옥교 심두영(汞橋沈斗永),이산 이만용(此山李晩用1792~1863),부성 이의철(蓉城李懿喆1779~?)등과 시회를 열어 연작(聯作)으로 지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다(逢新人)'이 '성재집(成齋集)'에서 확인된다.

김각의 친필본 자료인 '운관시축'은 초의스님이 1842년에 김각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김각과 초의스님, 그리고 김각과 교유했던 오하사, 김석엄 등 4명의 벗들이 지은 시를 수록한 ‘운관사회방서(雲館四會訪序)’와 대흥사 수행승 7명에 대한 찬시(讚詩) ‘대둔칠사(大屯七師)’뿐 아니라 창암 이삼만과 관련된 시 등 수편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는 시축(詩軸)이다.

이 자료엔 초의스님의 명성이 호남지역에 회자되었으며, 김각과 속 깊은 우정을 나누웠던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시문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실제로, 김각과 승려들의 교유가 어떤 동기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운관시축'은 1842년 10월과 11월과 중동(仲冬)13일의 일들을 수록한 시축이고, 초의가 '운옹과 월사가 앞의 운으로 시를 지어 보내왔기에 그 운으로 시를 지어 다시 보내다'는 시를 1843년경에 지었다.

김각이 초의스님을 만난 것은 1842년~1843년에 집중되어 있다.

김각이 호남칠고붕(湖南七高朋)이었다는 사실에서 그가 대흥사 승려들과의 교유는 이미 호남에서 아름다운 고회(高會)로 회자(膾炙)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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