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의 존재론

[책마주보기] 편혜영의 '저녁의 구애'(서운정)

공유
기사 대표 이미지

[새전북신문] 산 사람 몫의 조화(弔花)란 언어의 모순이다. 하지만 편혜영 단편집 《저녁의 구애》 에서 이 모순은 죽음이 유예되는 조건이 된다. 화원을 운영하는 “김”(〈저녁의 구애〉)은 위독한 노인 앞으로 주문된 화환을 싣고 가면서 그 죽음이 완료되기를 기다린다. 말하자면 죽음을 결론 지은 상태에서 애도가 죽음보다 먼저 도착해 대기하는 세계다. 즉 이 소설은 죽음이 삶의 시간 속에서 지연되는 유예의 원리가 관통한다. 미룬다는 것은 단순히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하리라는 가정을 유지하는 것으로 조화처럼 완료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며 죽음의 확실성을 인식할 때에만 비본래적 일상에서 깨어나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다. 밤의 도로에서 불타는 트럭을 목격한 순간 “김” 또한 자신의 코앞까지 육박해 오는 죽음을 인식한다, 그때 오랫동안 미뤄 온 전화를 걸어 여자에게 구애하게 되는데 이러한 행위는 남자의 죽음 자각이 결단을 낳는다는 구도다.

“김”의 구애는 침몰하는 자의 조난 신호와 같은 것으로 수신인이 반드시 그 여자여야 할 필연성을 지니지 않는다. 죽음의 유예를 위한 존재의 발화이자 존재를 존재케 하는 가능성으로서의 방식일 것이다. 하이데거가 죽음을 실존이 마지막으로 움켜쥘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 언표했듯 편혜영은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 가운데 유예를 가장 닮은 시각인 저녁의 빛 속에 존재를 오래 세워 두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미뤄지는 죽음 뒤의 삶일 것인바, 이러한 명제를 말하는 대신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이 단편집에서 편혜영은 유예의 존재자들을 공간과 시간의 축으로 변주하기도 한다. 공간의 축에 <토끼의 묘>가 있는데 여기서 그 남자에게 파견 근무라는 형식은 지금 여기의 삶을 임시로 만들고 임시의 존재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으므로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따라서 그 남자가 유기된 토끼를 거두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육에서도 야생에서도 추방된 짐승은 살아 있는 정의이며 토끼에게 끝내 마련되는 집이 아니라 묘(墓)라는 결말은 유예된 삶이 확실하게 도착하는 유일한 주소(공간)로 작동한다.

다음으로 시간의 축에는 <동일한 점심>이 있다. 달력만 넘길 뿐 아무것도 갱신되지 않는 나날은 미래가 아니라 오늘의 무한 복제이고 그 반복은 살아 있는 채로 미리 수행되는 정지 곧 죽음의 예행연습에 가깝다. 뿌리 없는 공간과 갱신 없는 시간이 만나는 자리에서 편혜영 특유의 문체가 태어난다. 감정 형용사를 걷어 내고 등속(等速)으로 통과하는 무표정한 문장이 그것인데 텍스트가 미룬 죽음의 감정은 독자의 몫으로 넘어오는 형식이다. 결국 편혜영은 세 편의 단편을 통해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죽음의 유예 상태를 지속함으로써 삶의 가능성을 추동한 것이라 하겠다.



서운정 작가는



군산 출신으로, 제18회 ‘바다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솔바람소리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