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가운데]초종교시대, 종교의 공적 책임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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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종교는 오랫동안 인간이 삶의 의미를 묻고, 고통을 극복하며, 공동체의 질서를 만들어 온 정신문화의 산실이었다. 서양에서는 신화적 세계관과 씨름하며 태어난 로고스의 사유가 기독교 신학과 만나 서구 정신의 한 축을 이루었다. 동양에서는 불교의 공과 연기, 유교의 인, 도교의 무위자연, 한국 민족종교의 개벽사상이 시대의 고통을 해석하고 새로운 길을 여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종교는 신앙과 수행에만 머물지 않았다. 관혼상제와 세시풍속은 우리들 삶의 영역에 깊이 물들어 있고, 사찰과 성당의 건축, 범패와 성가, 불상과 성화는 인간의 염원과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종교는 정치와도 때로 긴장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형성에 깊이 관여해 왔다. 종교는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의미와 질서를 제공해 온 셈이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냉정하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종교를 가진 성인의 비율은 2004년 54%에서 2021년 40%로 줄었고, 2025년에도 종교가 없다는 응답이 60%에 이르렀다. 통계청 조사에서도 무종교 인구가 종교인구를 앞질렀다. 제도종교의 권위와 소속감이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종교계는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고 종교성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챙김과 명상, 요가와 호흡수행, 템플스테이와 산사 체험을 통해 삶의 의미와 내면의 평화를 찾고 있다. ’K-명상’과 ’K-웰니스’가 확산되는 현상도 이러한 흐름을 보여준다. 서구에서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 필자는 이를 ’초종교시대’라 부르고자 한다. 종교가 소멸하는 시대가 아니라 종교적 의미와 영성이 교단의 울타리를 넘어 새롭게 재구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초종교시대에 한국 종교계가 맡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정부와 대기업은 AI반도체와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국가적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기술 강국으로 도약하려는 선택은 필요하며 국민의 기대도 크다. 그러나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다. 일자리 감소,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디지털 취약계층의 소외, 산업 간 불균형과 이익 분배의 갈등은 결코 도외시 할 수 없는 문제다.

기술의 진보가 곧 국민의 행복과 정신적 성숙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대기업의 막대한 이익이 다양한 영역의 노동자와 시민의 삶으로 고르게 흘러가지 못하고, 지역과 세대의 격차가 더 커진다면 성장의 환호 뒤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깊은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가 남기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의 AI산업에 쏠림 현상은 정신문화와 예술, 돌봄과 올바른 사람됨의 교육처럼 수치로 환산하기 어려운 영역이 기술산업의 뒤편으로 밀려나기 쉽다. 물질적으로 풍요하지만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회는 결코 선진사회가 아니다.

종교는 정교분리의 시대에도 올바른 사회를 위한 공적책임이 있다. 1919년 3·1독립운동에서는 천도교·기독교·불교 지도자들이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종교인과 시민들이 명동성당과 거리에서 민주주의의 등불을 지켰다. 한국 종교는 위기의 순간마다 개인의 구원을 넘어 사회에 참여하며 공동체와 나라의 운명을 함께 짊어져 왔다. 종교는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고통을 공감하고, 외로운 이의 곁을 지키며, 몸과 마음을 함께 돌보는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이다. 동시에 인류사회와 자연생태계를 공존하게 하는 AI윤리에 대한 공동의 대처가 필요하다. 지역 불균형과 취약계층 보호에 대한 공론화를 통해 성장의 결실이 사회 전체에 공정하게 돌아가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계가 이러한 문제에 침묵한다면 종교의 사회적 신뢰는 더욱 무너질 수밖에 없다. 교단의 이해관계를 넘어 자연과 생명의 보호, 인간 존엄과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지키는 일에 나서야 한다. 초종교시대의 종교는 고립되고 갈라진 사회를 연결하고 무너지는 인간성을 살려내는 공공의 영성이 중심축을 이루어야 한다. AI 강국을 만드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서로 돕는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기술에는 집중투자와 속도가 필요하지만 사회에는 올바른 방향이 중요하다. 바로 그 방향을 묻고 제시하는 것이 한국 종교계의 미룰 수 없는 시대적 책무다./박광수(원광대학교 명예교수·K-전통문화학술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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