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요즘 가장 잘 팔리는 드라마의 서사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를 '패도 되는 악'으로 만드는 이야기다. 서사는 단순하다. 일단 한 놈을 고른다. 사회적으로 약한 위치면 좋다. 예를 들어 10대 학생들이다. 가능한 언론에 보도됐던 극단적인 예를 찾아서 스토리를 붙인다. 이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강력한 주인공을 내세운다. 거의 범죄도시 마동석급 인물이 나타난다. 내부에 학생이나 교사는 문제 해결의 주체가 아니다. 외부에서 나타난 힘 센 주인공은 나쁜 놈을 응징하기 시작한다. 법도 필요 없다. 여기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나쁜 놈은 죗값을 받아야 옳다.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죄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 사회적 담론이 크게 형성되면서 특정 집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만들어지는 일이다. 예를 들면 청소년들은 시민으로 존중해야 할 주체가 아닌, 두들겨 패서라도 사람 만들어야 하는 관리·통제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지점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굳어진다. 그저 드라마로 정의가 승리한다는 수준에서 기분 좋게 보면 좋으련만 그 나쁜 놈을 일반화해 버린다.
요즘 교도소가 초만원이다. 서너 명 들어갈 곳에 두 배 이상 들어간 교도소까지 있을 정도로 범죄 저지른 어른들이 많다. 그 안에는 별의별 직업군이 넘쳐 난다. 대통령을 시작으로 변호사, 의사, 교사에 백수, 연예인, 운동선수까지 즐비하다. 범죄자들의 온갖 직업이 있다고 해서 어른들 모두를 그렇게 예비 범죄자로 인식해서 관리·통제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약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다. 세월호 피해자들을 대했던 일베와 당시 정부를 지지했던 일부 세력의 행태, 학교에서 불과 십여 년 전까지 매일 두들겨 맞아야 했던 피해자로서의 학생들, 오랜 시간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되었던 호남, 그동안 억압받아 왔던 여성들의 문제까지 이상하리만큼 우리 사회는 사회적 약자들의 소수 일탈을 극대화해서 그들을 짓밟는 무기로 삼고 혐오를 키워 가는 것만 같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용어를 뒤집어 혐오 표현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일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다. '참교육'이나 '내란' 같은 단어가 본래 의미와 다르게 소비되는 현상 역시 그 사례다. 강자가 사회적 약자를 짓밟던 일이 어느새 사회적 약자를 혐오해도 된다는 사회적 담론으로 번져가고 있다. 이런 서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극우세력의 행태다. 일본과 미국 등의 극우와는 다르게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약한 이들을 골라서 공격한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시민단체 등 사회적 약자와 진보적 시민사회를 공격 대상으로 삼고, 외부의 강력한 구원자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사고방식도 이러한 서사와 맞닿아 있다.
거악을 끌어내어 비판하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나? 부정부패, 반사회적 인물, 마약생산과 유통업자, 반민주적인 부패 정치인까지 실제 너무 큰 해악을 끼치는 인물들이 있다. 문제는 이런 거악보다 혐오의 대상으로 사회적 약자들이 지목되고, 그 안의 극소수 문제가 부각되면서 사회적 담론이 형성되고, 소수자들은 더 악한 이미지가 굳어지는 모양새다. 사회적 약자를 악으로 몰아붙이며 혐오의 대상화를 만들어 내는 짓을 멈춰야 한다. 문제 해결의 주체를 그 안의 당사자들이 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에 대한 부분을 더욱 강조해야 옳다. 이 모든 사람들의 관계를 파시즘적인 어떤 거대 권력자가 해결해 준다는 정신 나간 인식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의 주인으로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힘을 길러야 한다. 특히 청소년에게는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될 권한과 책임, 그리고 경험을 돌려주어야 할 때다./정건희(청소년자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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