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신라 하대 선종미술과 실상산문(지은이 진정환. 펴낸 곳 학연문화사)'은 신라 하대 불교미술을 오랫동안 따라붙어 온 “쇠퇴기”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형 질서가 잉태되고 자라난 거대한 전환기로 다시 읽어 보려는 책이다.
지은이는 1997년 초가을 국립전주박물관의 '전북의 불적 조사'에 참여, 처음 실상사를 찾았고, 람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를 건너 실상사 경내에 들어섰던 경험을 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약사전 안 철불,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선 석등, 증각대사탑과 수철화상탑, 백장암의 석등과 조각이 가득한 삼층석탑을 마주하며 품었던 “이 모든 것이 왜 바로 여기서, 바로 그때 만들어졌을까”라는 의문이 이 책을 이끄는 핵심 질문이다.
한국 미술사 연구에서 신라 하대는 신라 중대의 완성과 균형 이후에 찾아온 이완과 퇴보의 시기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지은이는 신라 하대의 미술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기가 단순한 내리막이 아니라 미술품의 양식, 제작 주체, 향유 계층, 조성 지역의 지도가 새롭게 그려진 전환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책은 그 전환기의 풍경 한가운데 자리 잡았던 실상산문을 통해 신라 하대 불교미술의 의미를 다시 조명한다.
실상산문은 신라 왕실로부터 처음 공인을 받은 선종 산문이다.
826년 홍척이 귀국한 뒤 흥덕왕과 김충공의 귀의를 받으면서, 선종은 신라 사회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를 얻었다. 이후 홍척의 제자 수철의 시대에 이르러 실상사는 이전의 사찰에서 시도된 적 없는 새로운 조형물들을 차례로 만들어냈다. 재료의 변화를 보여주는 철불, 산문의 상징이 된 고복형 석등, 한국 승탑사의 출발점이 된 증각대사 승탑이 그것이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세 조형물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닌, 새롭게 출현한 산문이 자기 사상과 정체성을 시각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창안한 “산문 고유의 미술품”이었다는 점이다.
『신라 하대 선종미술과 실상산문』은 지은이가 학계에 발표해 온 여러 논문을 단행본의 체제로 재구성한 책이다. 그러나 단순한 논문 모음이 아니라, 한 사찰의 미술품을 산문, 더 나아가 선종미술이라는 더 큰 단위 속에서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이다. 지은이는 미흡하게 다루었던 부분에 새로운 자료와 해석을 보태고, 장과 장 사이의 연결을 새롭게 구성하며, 실상산문과 신라 하대 선종미술의 흐름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다.
Ⅰ부 「신라 하대 불교미술」은 책 전체의 서장에 해당하며, 신라 하대 불교미술을 비례와 형식, 새로운 조형물의 등장, 조성 지역의 확대라는 세 측면에서 개관한다.
지은이는 석불·석탑·석등의 비례 변화, 철불·팔각원당형 승탑·고복형 석등·쌍사자 석등의 등장, 불교 조형물 분포의 전국적 확장을 검토하면서 850년 전후가 왕권의 안정, 왕실과 선종 산문의 제도적 결합, 조형 양식의 재편이 동시에 일어난 구조적 분기점이었다고 논증한다.
Ⅱ부 「선종미술의 모태, 실상산문의 불교미술」은 실상사의 철불, 고복형 석등, 팔각원당형 승탑을 중심으로 실상산문 고유의 미술품이 어떻게 창안되었는지를 살핀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의 조성 시기와 존명, 고복형 석등의 양식과 실상산문 소속 사찰과의 관계, 팔각원당형 승탑의 시원 문제를 차례로 검토하며, 실상산문이 신라 하대 선종미술의 모태였다는 핵심 명제를 구체적으로 입증한다.
Ⅲ부 「조사 숭배와 불교미술」은 산문의 개산조 홍척과 그의 제자인 수철·편운에게 시선을 옮긴다. 저자는 홍척이 처음 머물렀던 “실상선정”이 현재의 실상사가 아니라 백장암 터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백장암의 삼층석탑과 석등이 수철이 스승 홍척의 초기 주석처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기념탑 성격의 조형물이었음을 밝힌다.
또, 편운화상탑의 조성 배경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실상사 내부의 정치적·종교적 역학과 후삼국기 남원 일대 불교미술의 흐름을 함께 살핀다.
Ⅳ부 「실상사 불교미술의 영향」은 실상사가 창안한 미술품들이 산문 소속 사찰과 다른 산문으로 어떻게 확산되어 갔는지를 추적한다. 임실 진구사가 신라 하대에 실상산문 소속 선종 사찰로 변모했음을 밝히고, 옥룡산문의 쌍사자 석등을 통해 “산문 고유의 미술품 창안”이라는 양상이 실상산문에만 국한된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지은이는 전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2001년 문학석사학위를, 2013년 「高麗前期 佛敎石造美術 硏究」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신라 하대부터 고려 전기, 세속적·종교적·문화적 전환기에 불교미술의 모습뿐만 아닌 조형의 원리가 어떻게 변했는가를 규명하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2002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및 경주, 광주, 전주, 진주, 제주, 익산 등 소속관에서 학예연구사, 학예연구관, 학예연구실장으로 근무하면서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연구에 참여했다. 지난 1월부터 국립경주박물관 교육문화교류과 학예연구관으로 재직하고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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