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지붕 없는 박물관, 기록으로 ‘진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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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전북신문]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마르코 폴로는 황제 쿠블라이 칸에게 세상 수많은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제가 화려한 궁전의 규모나 웅장한 기념비의 높이를 궁금해하자, 마르코 폴로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는다. “도시는 그런 물리적 수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척도와 과거의 사건들이 맺는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결국 마르코 폴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도시를 진정으로 완성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의 켜’라는 사실 아니었을까.



우리는 흔히 화려하고 새로운 것에 쉽게 시선을 빼앗긴다. 하지만 도시의 진정한 매력과 대체 불가능한 유니크함(Uniqueness)은 그 지역이 본디 품고 있는 고유한 정체성을 깊이 파고들어 시민들과 짙은 공감대를 형성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흔히 도시 재생의 교과서로 불리는 스페인의 빌바오(Bilbao)가 매년 100만 명 이상의 발길을 이끄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것도 이와 같다. 젖줄인 네르비온 강가에 지역의 과거 주력 산업이었던 ‘철강과 조선’의 맥락을 엮어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웠기에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장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이 품은 강력한 본연의 힘은 무엇일까. 두말할 것 없이 ‘역사와 문화의 힘’이다. 남원 시민들은 으레 남원을 가리켜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며 드높은 자긍심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자긍심이 허공에 흩어지는 구호에 머물지 않고 현실에서 온전히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문화적 저력을 체계적으로 증명하고 꿰어낼 단단한 ‘그릇’이 필요하다.



세계 문화 기관의 중요한 화두인 '라키비움(Larchivium)'이나 '글램(GLAM)'의 개념처럼, 기록관과 박물관, 도서관, 미술관의 기능이 유기적으로 융합한다면 어떨까. 오래된 도자기 하나를 덩그러니 전시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도자기를 빚었던 사람의 빛바랜 일기와 낡은 도면을 곁들여 한층 입체적이고 생생한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기록이 전면에 나서 생생한 서사를 이끌어가는 전시 기법을 ‘아카이브 큐레이팅(Archive Curating)’이라 부를 수 있다. 훌륭한 유물로 뼈대를 세우고, 문서·도면·사진 등 일상의 기록물로 도시의 이면을 웅장하게 풀어내는 이 융합의 방식이 남원에 접목된다면 어떨까.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청주기록원, 이천시립기록원 등 기초지자체 단위에서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 근거한 자치기록원 설립이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남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특화된 모델을 창조해 볼 수 있다. 시민의 삶을 아카이빙하는 ‘기록관’의 기록 기능과, 유구한 역사를 보존하는 ‘박물관’의 학예 기능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남원의 전근대와 근현대를 아우르는 ‘남원역사기록원(가칭)’의 탄생이다.



물론 단순한 물리적 결합은 아니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따른 박물관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공공기록원의 역할을 융합하려면 양쪽의 법적·제도적 요건을 조화롭게 충족해야 한다. 하지만 캐나다의 통합 문화공간 ‘더 룸스(The Rooms)’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산하 대통령 기록관 등 해외 우수 기관들은 이미 두 영역의 경계를 허물며 지역 역사 보존의 표본이 되었다. 남원 역시 이 융합 모델을 통해 박물관과 기록관의 전문성을 동시에 누리는 선도적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



박물관의 담담한 유물이 뼈대가 되고, 기록관의 생생한 기록이라는 살을 붙여 하나의 온전한 생명력으로 숨 쉬는 공간. 서로의 장점을 절묘하게 섞어 남원 본연의 힘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다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칭호는 마침내 완벽하게 ‘공증된 자부심’이 될 것이다.



상상해 보라. 높고 포근한 지리산의 능선을 메타포로 삼은 웅장한 전시 벽면 위로, 수백 년을 이어온 남원의 유물과 평범한 시민들의 땀내 나는 일상 기록이 파노라마처럼 굽이치며 펼쳐질 눈부신 풍경을. 유물과 기록이 융합된 그 넉넉하고 넓은 품 안에서, 남원 시민들의 오랜 자긍심은 비로소 시공간을 넘어 가장 확실하고 아름다운 ‘진짜’로 기억될 것이다. /권순명 남원시 기록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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