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전북신문] 2026년 초여름,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의 아담한 전시장 초입에는 작지만 깊은 울림을 가진 워낭 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농경시대 우리 조상들의 삶에서 가장 귀중한 재산목록 1호이자 식구로 여겨졌던 ‘소’의 목에 달렸던 ‘워낭’들이 한데 모여 내는 맑고 서글픈 소리다. 광주 최초의 사립 민속박물관인 ‘비움박물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서울 인사동에서 개최한 특별전 '한반도의 평화-워낭소리'는 도시화와 산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우리가 스스로 내던지고 잊어버렸던 근현대 생활유물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뜻깊은 자리를 연출했다.
공예가 목원 최광원작가와 고근호작가와의 콜라보는 이번 전시회의 품격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전시회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박물관협회가 추진하는 ‘2026 K-뮤지엄 지역순회전시 지원사업’에 당당히 선정되어 그 독창적 가치와 공익성을 전국의 문화계로부터 인정받은 결과물이다. 5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직 한 사람의 집념과 사명감으로 채워진 3만여 점의 유물 중,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소의 위치를 알려주고 해로운 존재로부터 가축과 농부를 지켜주던 액막이 도구 ‘워낭’ 200여 점과 광주 지역 예술가들이 제작한 설치예술 작품 49점이 자리했다. 버려진 고물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건져 올린 비움박물관 이영화(80) 관장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거대한 서사시이자 거룩한 기록이다.
지난 6월 10일 열린 특별전 개관식은 유독 기묘하고도 필연적인 시간의 중첩을 보여주었다. 1926년 일제강점기 민족의 고결한 독립 의지를 분출했던 6·10 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1987년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시민의 염원을 모았던 6·10 민주항쟁 39주년, 그리고 광주 비움박물관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지 딱 10주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이 세 가지 시간은 ‘사람의 힘, 기억의 힘, 문화를 지키는 힘’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줄기 속에서 만났다.
본사와의 서울 인사동 현장 인터뷰에서 이영화 관장은 “박물관은 단순히 먼지 쌓인 과거를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단단한 다리가 되어야 한다”며 “문명사회에서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심했을 때, 그것은 결국 ‘한반도의 평화’와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결론에 닿았다”고 기획 취지를 밝혔다.
실제로 비움박물관은 유물을 수동적으로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시민들이 모여 배우고 연대하는 인문학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독자적인 기획행사는 물론 참배움터를 비롯 다양한 문화예술 단체와 함께 진행하는 인문학 강연에는 박맹수전원광대총장과 이태석재단 구수환이사장등 시대정신을 이끄는 명사들이 초청되어 문전성시를 이루며 깨어 있는 시민정신의 온기를 증명하기도 했다.
이번 서울 전시를 찾은 박맹수 전원광대총장은 “비움이라는 이름의 철학이 마침내 드넓은 채움으로 증명된 역사적 순간이다”고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영화 관장의 유물 수집에 대한 열망과 인간 및 사물에 대한 지극한 시선은 그의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다. 전라북도 순창군의 한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난 이 관장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평생을 교육에 헌신하며 팔남매를 키워낸 청렴하고 올곧은 지식인이었다.
때로는 시대의 모순과 못된 벼슬아치들의 횡포에 깊은 한숨을 지으면서도 자식 농사와 제자 양성에 일평생을 바쳤던 아버지는 묵묵히 쓸쓸한 미소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평생 현실 속에서 버려지고 소외된 사물들을 거두고 어루만지는 강인한 내면의 동력은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이 관장은 지난 50여 년 동안 전국의 시골 장터와 철거 단지, 고물상을 이 잡듯 뒤지며 버려진 물건들을 수집했다. 소, 돼지, 닭 같은 짐승마저도 한 식구처럼 대접해주고 지극히 사랑했던 우리 조상들의 대범하면서도 소박한 슬기, 궁핍한 삶 속에서도 막사발에 아낌없이 퍼담던 고봉밥의 넉넉한 인심을 사물 속에서 맛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스로 고급스러운 서양 음악을 들을 줄 아는 귀도, 수준 높은 고미술품을 식별할 줄 아는 안목도 없었다고 낮춘다. 그러나 숙명처럼 버려져 뒹굴던 손때 묻은 민속품들을 주워 모아 닦고 또 닦아내면서, 사물이 가진 진정한 아름다움의 자유는 인간이 만든 가치나 계량을 초월한다는 위대한 진리를 홀로 깨달았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아침의 나라 한반도에서 농사짓던 무명(無名)의 사람들이 남긴 생활용품이야말로 가난했지만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온몸과 마음을 바쳐 기어코 살아낸 가장 부지런하고 정직한 삶의 흔적이라는 확신이었다.
“가난을 머금고 서 있는 옛 물건들이 행여 오늘날 문명인들의 차가운 냉소와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늘 걱정이 앞섭니다. 허나 돌이켜 보면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서로 돕고 아끼고 나누는 ‘두레 정신’을 삶의 으뜸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보잘것없다며 업신여기고 내던져 버린, 손때 묻은 민속품들 속에 바로 대한민국이 지속가능할 수 있는 오래된 미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2016년 3월 17일, 그녀는 칠순의 나이에 옛 광주읍성의 동문터인 ‘서원문터’ 자리에 마침내 비움박물관의 기둥을 세웠다. 자신이 소유한 모든 물질과 욕망을 ‘비워내어’ 세상의 기억을 ‘채우겠다’는 서약의 실현이었다. 차고 넘치는 산업사회의 물질적 풍요만이 결코 인간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님을 깨달은 이 관장은, 스스로를 낮추어 ‘와우지당의 어머니’라 칭하며 오늘이 있기까지 음으로 양으로 자신에게 힘이 되어준 이름 모를 모든 이들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하고 있다.
이번 서울 특별전의 메인 테마인 ‘워낭’은 농경문화의 단순한 유물을 넘어, 한반도의 전쟁을 막고 평화 정착을 염원하는 고도의 예술적 메시지로 승화되었다. 과거의 투박한 유물 100여 점과 현대 광주 지역 예술가들이 참여한 설치미술 49점이 한 공간에서 조우하며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문화적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특히 해마다 5·18 민주화운동 기획 전시를 거르지 않고 개최하며 역사적 아픔을 예술로 치유해온 비움박물관은, 올해 특별히 자식과 남편을 잃은 ‘오월 어머니들의 피눈물 어린 마음’을 붉은색의 평화 병풍 작품에 담아내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과거 농부들에게 워낭이 소를 보호하고 액운을 막아주는 존재였듯, 오늘날 대한민국 전역에 울려 퍼지는 이 워낭소리가 분단과 갈등의 액운을 막아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다.
전시장을 찾은 참배움터 정경미 대표(북카페별밭)는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과거를 깊이 회상하고 오늘을 반성하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가난했지만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온몸과 마음을 바쳐 기어코 살아냈던 우리 부모들의 부지런하고 정직한 삶의 흔적들. 쓸모를 다해 버려진 뒤에도 마침내 예술적 아름다움과 역사의 증언으로 다시 채워지는 민속품의 경이로운 연금술이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을 뜨겁게 담금질 했다. 생전 이어령 교수가 말했던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문화의 힘’을 그대로 구현해낸 비움박물관의 지난 10년은 끝이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와 잊혀진 역사를 향해 다시금 힘차게 뻗어 나가는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다.
/서울=정종인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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