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조선 1468년(세조 14년), 왕은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에서 종친·재신 등과 담소하다가 아버지 세종이 생각났다. 이에 종친에게 명해 기생 8명을 불러 언문 가사를 주고 부르게 하자 말없이 듣던 세조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니 곁에 있던 신하들도 따라서 눈물을 쏟았다. 이때 기생들이 부른 언문 가사가 바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1914년 봄, 부안 내소사에서 20리 거리에 있는 실상사(實相寺)는 법당이 퇴락하고 본존불도 이제는 수리가 불가능해지자 내소사 주지 백학명(白鶴鳴)은 불상을 소각하기 직전 복장을 연다. 이때 '월인천강지곡 '상권 1책이 발견됐다. 실상사는 세조를 추념하는 사찰 중 하나였다. 세조가 기생들에게 월인천강지곡을 부르게 하기 2년 전인 1466년 3월, 세종의 형이자 세조의 숙부인 효령대군은 당시 67세 나이로 부안 실상사를 찾아 삼존불 조성에 권선(勸善)하는 한편 그 보시문(普施文)을 썼다. 20세기 초반에 발견된 월인천강지곡은 바로 이 삼존불 봉안식에서 복장물의 하나로 들어간 것이다.
부처를 찬양한 월인천강지곡 중 복장으로 들어간 이 책은 이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972년 대한교과서(지금의 미래앤) 주식회사 김광수 사장에게 인수되어 이 회사 미래앤박물관에 보존되다가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장서각에 기탁됐다.
국보 '월인천강지곡'은 1449년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해 지은 장편 노래를 수록하고 있다. 1914년 부안 실상사 불상 내부에서 발견된 이 책은 상권 1책에 194수의 노래가 실려 있는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 받는다. '월인천강지곡'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간행된 최초의 한글 활자본이다. 비슷한 시기 간행된 다른 문헌과 달리 한글을 큰 활자로, 한자를 작은 활자로 표기했다. 이 때문에 초기 국어학 연구와 출판인쇄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받는다.
본래 상중하 세 권이었으나 현재 권상과 일부 낙장만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15세기 중반 부안 실상사 불상의 복장물(腹藏物, 불상 안에 넣는 물품)로 봉안됐고, 실상사 인근에 있는 내소사 주지가 훼손된 불상을 소각하기 직전 복장을 열면서 발견됐다. 이후 대한교과서(현 미래엔)가 인수해 2013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했다.
1963년 보물 398호로 지정됐다가 2017년 국보로 승격됐다. 세종대왕의 묘호를 따 출범한 세종시에서 국보인 월인천강지곡을 기탁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중이다. 내소사의 학식 높은 승려였던 국묵담 스님이 '월인천강지곡'의 학술적·종교적 가치를 알아보고 실상사 주지로부터 책을 인수해 안전하게 반출했다. 만약 국묵담 스님이 이때 책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6·25 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실상사 전체가 불타버릴 때 함께 전소될 뻔한 역사적 위기를 넘겼다.
부안 실상사(扶安 實相寺)의 이름에 담긴 불교적 의미는 '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된 모습(실상, 實相)'을 깨닫고 수행하는 도량이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 등의 전각과 고려 시대 불상, 대장경 등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모두 불타 소실됐다. 오랫동안 터만 남아있다가 1995년부터 복원 불사가 진행되어 미륵전, 삼성각 등의 일부 전각이 건립됐다. 사찰 바로 옆은 원불교 교조 박중빈이 초당을 짓고 수도했던 곳으로, 원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인 변산성지로도 지정되어 종교적 의미가 깊다./이종근(문화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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