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하는 절박함은, 근거 없는 자신감의 수위를 한껏 높였다. 엄마는, ‘구멍에 든 뱀이 석 자가 될지 열 자가 될지 나와 봐야 안다’라는 전래 속담을 맛난 간식처럼 들려주시곤 했다. 엄마의 가르침대로 쭈뼛거리지 않고. ‘못 먹어도 고(Go)'를 야무지게 선택했다. 감사하게도, 순간의 촉이 만든 엉뚱한 발상은 짜릿한 해결사가 되었다.
세탁실 문을 여는 순간, 남실거리는 물속에서 잡동사니들이 허리띠를 풀어놓고 뱃놀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이게 웬 난리야?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라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세탁기를 작동시키고 잠시 외출하고 돌아와 빨래를 널려고 뒷문을 열었더니, 배수구로 나가야 할 구정물이 ‘청개구리 심보’를 발동했는지 배수구 위로 마구 솟구치고 있었다. 그래도, 천만다행이었었던 것은 범람한 물이 거실까지는 들어오지는 않았다. 맨발로 ‘첨벙첨벙’ 코브라 줄로 돌려도 보고, 뚫어 뻥으로 압력을 주어 봐도 물 한 방울 나갈 기미조차 안 보였다. 하는 수없이 전문 기사를 부를 수밖에 없겠구나!‘ 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인생 뭐 별거 있나’ 하며 늘어져 있던 뇌가,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갑자기 펌핑을 하기 시작했다. ‘불가능하다고, 해 보기는 해 봤어? 무슨 일이든 확신 90%와 자신감 10%로 밀고 나가는 거야. 고정관념이 멍청이를 만드는 거야.'라는 지금은 고인이 된, <실전의 뇌섹남, 정주영 회장>의 어록들이, 실을 바늘에 꿰다 그만 놓쳐 버린 실타래 풀리듯 술술 나왔다.
순간, 유년 시절을 기억해 내는 바람 한 점이 휙 불어왔다. 그때는 땔감이 엄청 귀하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가끔 뒷동산에 올라, 납작하게 깔린 마른 솔잎들을 대나무 갈퀴로 긁어모아, 살아온 세월만큼 고단함을 머리에 이고 등허리 옥죄며 집으로 돌아오시곤 하였다. ‘그래 바로 이거다. 갈퀴로 시원하게 한번 긁어나 볼까!’ 생뚱맞다는 생각에 헛웃음도 났지만, ‘일단 뭐라도 해보는 거야’ 하며 현관 앞에 걸어 둔 갈퀴 닮은 효자손을 가져다가 배수구를 ‘휘휘’ 내저었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쪼록 쪼르륵’ 순식간에 물이 빠져나가면서 양파 껍질이 딸려 나왔다. 세탁실 안쪽에 보관 중이던 양파 껍질이 떨어져 나가 배수구를 막는 접착제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에 긍정의 마음 한 스푼을 더 얹어 헛꽃이라도 품어보길 잘했다. 헛꽃은 벌. 나비를 모아 진짜 꽃의 열매를 맺게 했다. 야호~, 발명왕 '에디슨 모자'라도 쓰고 동네 한 바퀴 돌아볼까나!
오늘따라 유난히 햇살이 눈 부시다. 산들바람 부는 능선을 따라 줄줄이 걸어놓은 아찔한 아카시아꽃 향기에 숨이 멎을 것 같다. 코흘리개 시절, 아이들과 함께 까치발로 달콤한 아카시아꽃을 실컷 따 먹다가 배부르면 놀이가 빠질 수 없었다. 진초록 동전 수두룩 달린 실한 아카시아 이파리를 뚝 따서, 가위바위보 하며 시끌벅적했던 옛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여물어 가고 있을까! 이렇게 봄날은, 짙어가는 숲속만큼 또 하나의 추억을 기억해 내며 익어간다.
채백령 수필가는
문학광장 수필부문 등단
문인협회 정읍지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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