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명검(名劍)과 잊힌 대장장이,‘남원의 칼’을 기록으로 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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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주인공을 돕는 은둔의 '장인(匠人)'이 등장해 가슴을 뜨겁게 할 때가 있다. 대하사극 속 붉은 쇳물을 들이마시며 명검을 벼려내는 대장장이나, 불의 온도를 맨손으로 견뎌내는 도공의 모습이 그렇다. 우리는 스크린 속 영웅이 쥐게 된 찬란한 '결과물'에 환호하지만, 정작 그것을 만들어낸 장인의 치열했던 '과정'과 '삶'은 엔딩 크레딧과 함께 쉽게 잊히고 만다. 세상을 호령한 명검(名劍)은 역사에 남아 박물관 진열장을 차지하지만, 쇳물을 다루던 대장장이의 거친 숨소리와 굽은 손마디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기록의 세계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의 중대사나 행정청의 공문서는 서고에 겹겹이 보존되지만, 정작 지역의 경제와 문화를 묵묵히 지탱해 온 장인들의 이야기는 기록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일쑤다. 평생을 바쳐 이룩한 기술, 땀방울이 밴 도구들, 그리고 그들의 치열했던 생애는 한 개인이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속절없이 증발해 버린다. 지역 문화의 깊은 뿌리 중 한 갈래인 '장인의 삶'을 체계적으로 아카이빙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비정형적이고 흩어진 장인의 삶을 어떻게 온전한 기록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기록학에서는 이를 위해 ‘매뉴스크립트 주제컬렉션’이라는 전문적인 방법론을 활용한다. 매뉴스크립트란 규격화된 공문서와 달리 개인의 일기, 편지, 작업 노트, 스케치북, 심지어 손때 묻은 작업 도구와 생생한 구술 생애사까지 포괄하는 사적이고 다채로운 기록물을 뜻한다.

특정 장인이나 전통 기술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에 두고, 이와 관련된 파편적인 매뉴스크립트들을 입체적으로 수집하고 구조화하여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꾸러미(컬렉션)로 엮어내는 작업이다. 이 방식을 통하면 단순한 '인물 약력'을 넘어, 그 시대의 지역 풍속과 시장 경제, 기술의 변천까지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다층적인 사료가 탄생한다.

남원에도 오랜 세월 묵묵히 불꽃을 피워온 자랑스러운 장인들이 있다. 바로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남원의 칼(식도)'을 벼려낸 대장장이들이다. 버려진 기차 레일을 끊어다 밤낮없이 메질을 하며 전국 어머니들의 도마 위를 책임졌던 대장간의 이야기는, 남원 근현대사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는 훌륭한 교과서다. 남원의 지역기록관인 남원다움관은 올해 선정된 국가공모사업을 마중물 삼아, 잊혀 가는 ‘남원 대장간 이야기, 남원의 칼’을 대대적으로 아카이빙하고자 한다.

앞서 말한 '매뉴스크립트 주제컬렉션'의 방법론을 십분 활용하여, 대장장이 어르신들을 찾아가 그들의 기억을 구술 기록으로 채록하고, 수십 년간 쥐었던 무거운 망치와 낡은 장부, 칼의 도면 등을 수집해 남원 대장간 컬렉션을 구축할 것이다. 또한 남원다움관이 지향하는 '즐기는 기록'에 발맞춰, 쇳물의 열기와 망치질의 리듬을 시민들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흥미로운 '체험형 콘텐츠'도 함께 구상 중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칼을 벼리는 일과 기록을 벼리는 일은 묘하게 닮아있다. 뜨거운 불 속에 쇠를 달구고 수천 번의 메질을 가해 불순물을 덜어내는 대장장이처럼, 현장의 아키비스트(기록연구사) 역시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수집하고 다듬어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시대의 증언으로 벼려낸다.

지역을 먹여 살리고 문화를 일궈낸 사람들을 기억하는 도시는 결코 쇠락하지 않는다. 눈부신 5월, 남원의 골목 어귀에서 묵묵히 쇠를 두드리고 나무를 깎으며 평생을 바쳐온 지역 장인들의 굽은 등을 다시 한번 경건하게 바라본다. 그들의 땀방울 자체가 우리 지역이 보유한 가장 예리하고 빛나는 기록 유산이자 미래의 먹거리다. 이 뜨거운 삶의 기록들이 향후 ‘남원기록원’이라는 단단한 칼집 속에 온전히 보관되고 전승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남원시 기록연구사 권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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