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제 금산사 석고미륵여래입상(국가등록문화유산)은 근대조각의 대표적 작가 정관 김복진(1901~1940)의 대표작이다. 그는 구리가 아닌 석고와 금을 비롯, 강철과 시멘트를 주재료로 사용하여 현대적인 조각 기술을 전통 불교 건축물 내에 적용했다. 김복진은 이때의 제작을 두고 조각이 아닌 건축의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김제에서 만든 것이 아닌 경성에서 제작해 운반해올 예정으로 98개로 분할 제작됐다. 1935년 12월부터 착수된 금산사 본존불 제작은 사직동 아틀리에에서 그와 조각을 배우는 학생들 동원된 인부 6~7명이 참여했다.
대형 불상을 조성하던 전통적 방식이 사라진 이후 근대기에 새롭게 등장한 석고를 재료로 제작한 대표적 사례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
근대기 새로운 기법과 조형의지를 담아 낸 김복진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원래 미륵불만 모셨는데 임진왜란으로 훼손되자 수문대사가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다.
충청도 선비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1722년 11월 2일 금산사 장육불(丈六佛)의 엄청난 크기를 보고 작품을 남겼다. 장육불은 부처의 별칭으로, 그 키가 1장 6척에 몸이 황금색이었다는데서 유래한다. 그는 쇠로 주조했는데 높이가 20여 척은 되고, 아래는 철확(鐵鑊, 철가마)으로 쌍받침을 했다고 했다.
'호남에서 최고로 유명한 절은 금산사라. 첫 번째 보이는 건 동편의 장육불(丈六佛)이라네.손가락 끝까지 높이 뻗쳐야 좌대에 닿는 정도요. 고개들어 바라보니 정말 태양이라도 가릴 듯하네. 장엄하게 치장하느라 신라, 백제가 이미 망했으며, 창설의 공력 귀신에게 뺏길까 두렵네. 대중의 도움을 힘입어 시워진 줄 알겠으니, 명목(冥福)이 펼쳐져서 우리 백성들에게 미치리라'
금산사 미륵삼존불은 이보다 앞선 1626년 조성됐으며, 미륵존상의 개금(改金)불사를 행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복장문(服藏文)을 봉안한 것은 1708년이다.
하지만 이것이 1935년 화재로 미륵불이 소실되자 김복진이 석고에 도금해 모셨고, 협시보살은 수문대사 당시의 모습이다. 그는 한국 근대 조각의 개척자이자 항일 예술운동가였다. 금산사 미륵전 건물 지하엔 진표율사 당시의 미륵불 연화대가 남아 있다.
그는 1935년 12월 중순, 금산사에 높이 11미터의 미륵전에 안치할 본존불 제작을 진행했다. 금산사 미륵대불은 결국 김복진의 원래 모형과 거의 동일하게 1936년 8월 완성됐다. 다만 모형에 보였던 환한 미소는 사라지고 보다 근엄한 얼굴로 바뀐 것이 눈에 띈다.
1936년 7월 5일자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등은 "금산사 미륵상 재건, 조각가 김복진 씨의 역작품" 또는 "38척의 불상, 김복진 씨 제작 중"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작업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금산사(金山寺) 미륵상(彌勒像) 재건(再建)
조각가(彫刻家) 김복진(金復鎭)씨의 역작품(力作品)
조선에서 제일 큰 은진미륵 다음 가는 전북 김제 금산사(金山寺) 미륵상이 작년 여름 동사 화재(火災)로 인하여 없어진 후 관계자들은 크게 유감으로 있던 중 금산사 주지 황성렬(黃成烈)씨의 주선으로 동미륵 개건시주(施主)를 구하던 중 김수곤(金水坤)씨외 일반의 기부(寄附)가 많이 모이었으므로 작년 11월부터 비용 1만 4천 원으로 조선에서 권위 조각가(彫刻家) 김복진(金復鎭)씨에 부탁하여 제작중이었는데 불상의 높이가 33척에, 연대고(蓮台高)가 5척, 두부(頭部) 7척, 코(鼻) 4척, 입(口) 1척 5촌이 되는 거대한 불상이 오는 8월말 경에는 완성될 것이라는데 이 불상에 사용한 순금금박(純金金箔) 가격만 하여도 6천여 원에 달한다고 한다.(사진은 제작중의 미륵불상).
1936년 7월 사직동 아틀리에에서 금산사의 본존불 제작에 착수, 8월에 완성했다. 1938년 5월에 미륵존불 점안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1939년 3월 속리산 법주사 미륵불 제작에 착수했다.
한편 그는 1934년 12월 13일 신건설사 사건으로 검거, 전주로 압송 1935년 2월 20일 전주교도소에서 석방됐다.
'부처님 만들던 이야기
김복진
전라북도 금제군 금산면 금산리에 금산사라고 하는 큰 절이 있습니다. 이 절은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역사 깊은 곳으로서 서울 있는 광화문이나 남대문 만한 큰 절집이 그리 높지도 않고 얕지도 않은 산으로 울타리를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절에는 집만큰 것이 아니고 크나큰 부처님을 위하였기로 더욱 유명하였던 것입니다.
33척이나 되는 미륵부처님과 그 좌우에 27척이나 되는 보살상이 있어 조선에서는 제일 큰 절인 동시에 제일 큰 부처님들이었습니다. 이 부처님들은 맨 처음에는 구리 부처님이었으나 1,000여 년 전에 불이 나서 부서지고 그 다음에는 흙과 나무와 구리 부처님의 부서진 조각을 모아가지고 다시 옛날과 같은 부처님을 만들었더니 재작년 봄에 또 불이 나서 하룻밤 동안에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서 조선에서 제일가는 큰 부처님을 다시 조각하여보라는 말을 내가 처음 듣기는 그해 늦은 가을이었습니다.
나는 착수 설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크고 보니 그것은 그저 조각이라고 말할 수 없고 한 개의 건축이라고 생각이 되어지므로 날마다 숫자 계산으로 고생을 하다가 시험삼아 앞으로 조각할 큰 부처님의 1/10 되는 작은 부처님을 조각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주의하여 보면 알겠지만 조선의 부처님은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으니 얼굴이 반듯하고 어깨가 넓고 허리가꼿꼿하고 몸에 비교하여서 머리가 작은 부처님은 신라시대의 부처님으로 위엄이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하며, 또 한 종류는 몸에 살이 좀 많고 얼굴이 둥글면서도 몸에 비교하여 크고 어깨가 둥글고 앞으로 좀 숙인 듯한 부처님은 고려시대의 부처님이니 온순하게 보여서 친할 맛은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부처님보다 기운이 약하여 보이며 끝으로 몸보다 머리가 더 크고 허리가 아주 구부러진 부처님은 조선시대의 부처님으로서 촌생원님이 동네 아이들에게 천자나 가르치는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신라 때의 부처님 같이 조각을 하여 보자고 생각하였으니 그 까닭은 본래 부처님은 어질면서도 위엄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입니다.
시험 삼아 조각한 작은 부처님을 가지고 다시 10곱절 큰 부처님을 밤낮 여섯 달을 두고 내게 와서 조각을 공부하는 학생과 인부 6, 7명을 지휘하여서 여섯 달만에 겨우 대강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전 부처님보다 6자나 더 커서 모두 39척이나 되는 부처님이 우리 집 마당에 우뚝 서게 되니까 날마다 구경꾼이 평균 50명 이상이나 되고 그중에는 매일같이 와서는 자꾸 절을 하며 돈을 놓고 가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젯거리는 이다지도 큰 부처님을 서울서 700리나 되는 시골로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 하여 궁금증이 나서 일부러 물으러 오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여러 조각으로 나누게 된 것이니 아주 쉽사리 모두 98개로 나누어서 운반을 해다가 그것을 다시 맞추어 놓았습니다. 이번에는 강철 시멘트와 석고와 금을 가지고 된 것이니 이젠 결단코 불행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키는 39척이고 무게는 14,000근 가량이나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은진미륵보다 열댓 자나 작은 부처님이나 집안에 모신 부처님으로서는 아직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하략, 김복진 전집(부처님 만들던 이야기, 230~232쪽, 2026년 소명출판 발간)'/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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