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숭고의 주름(지은이 우찬제, 펴낸 곳 문학과지성사)'은 기후 위기라는 전 지구적 재난과 역사적 트라우마, 그리고 디아스포라의 고통이 인간 내면에 새긴 ‘부정적 주름’들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저자는 칸트적인 초월적 숭고를 넘어, 인간이 초래한 엄청난 파국 앞에서 무력감과 윤리적 책임이 뒤얽히며 발생하는 ‘재난적 숭고’를 동시대 비평의 전면에 내세운다.
지은이는 이번 비평집을 통해 비평이 단순히 작품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무너져가는 지구와 상처 입은 존재들의 신음을 제 몸에 새기는 치열한 ‘고통의 받아쓰기’여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이야말로 사유의 시작이라고 했던 레비나스, 예술을 ‘고통의 언어’라 불렀던 아도르노의 사유를 경유하며,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야말로 치유의 길임을 몸소 증명해 보인다. 비평은 텍스트라는 섬 안에 갇혀선 안 된다고, 미술과 음악, 생태와 역사, 영화와 철학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숭고의 주름'은 말한다.
1부 '횡단의 상상력'에서는 페루 나스카 지상화의 거대 기호에서부터 사유를 출발시킨다. 수천 년 전 대지에 새겨진 그 주름들이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차원이 접촉하는 사건의 표면”임을 통찰하며, 그 힘을 동시대 예술과 문학으로 이어나간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3’에서 고대 석관의 시선을 현대 관람자의 시선과 맞세운 갈라포라스-김, 100여 년 전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한인 디아스포라 서사를 백년초 이주 설화와 겹쳐 읽은 정연두의 '백년 여행기', 그리고 이중 스파이라는 분열된 존재를 통해 식민과 탈식민, 가해와 피해의 이항대립을 해체한 비엣 타인 응우옌의 『동조자』까지. 고통의 심연을 횡단해야만 비로소 열리는 상상력의 지평을 추적한다. 나아가 김승희, 장수진, 주민현의 시편을 경유하며 신자유주의의 건조한 현실 속에서 ‘말라가는 희망’을 진단하고, 한국전쟁의 노근리 학살과 광주의 5월로 이어지는 고통의 역사를 따라간다. 시대의 폭력과 역사적 참상을 회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일, 저자는 그 서늘한 ‘고통의 향유’야말로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지점이라고 말한다.
2부 '숭고의 주름'은 인류세의 기후 재난을 다룬 예술 작품들을 횡단하며 동시대적 숭고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롱기누스와 칸트로부터 이어져온 숭고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숭고의 주름’이라는 관점으로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 속에서 발생하는 무력감과 윤리적 책임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특히 파국 직전의 시간인 ‘11시 59분’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희망의 문장을 길어 올릴 수 있는지 묻는다. 동시에 물의 눈으로 바람의 노래를 듣는 생태적 감수성이 어떻게 새로운 시적 언어가 될 수 있는지를 탐문한다.
3부 '횡단하는 소리풍경'에서는 동시대 한국 시를 ‘소리풍경’이라는 독창적 프리즘으로 읽어낸다. 시를 ‘공기 중에 날려버리’기를 꿈꾼 정현종의 시 세계를 두고, 만물과 시선의 네트워크를 이루며 “무한 바깥”을 향해 비상하는 시인의 몽상이 어떻게 시적 깨달음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광주 바깥에서 광주의 5월을 경험한 최하림의 시에서는 “심연으로 내려가는 바람의 노래”를, 이재무의 시에서는 ‘정겨운 유목민’의 ‘낙타의 소리풍경’을 읽어내며 각각의 시인이 도달한 서정의 깊이를 짚는다. 이승하의 ‘사람 사막’에서 비를 비는 시혼, 곽효환의 사람과 풍경을 기록하는 시선, 그리고 한경옥의 시집을 ‘아트라베시아모의 서정’으로 풀어내는 독해까지. 지은이는 시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횡단하며 도달한 ‘소리풍경’을 되살려낸다.
4부 '디아스포라 횡단'에서는 한국 문학이 분단과 역사, 권력과 상상의 문제를 어떻게 넘어섰는지를 해부한다. 분단 상황을 초극하기 위해 ‘문화형 문학’을 발명한 최인훈의 성취를 재조명, 이념과 체제의 벽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돌파하는 일의 의미를 되새긴다. 홍성원의 『주말여행』에서는 “내 생각대로 살 수 있을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김원일의 소설에서는 연처럼 새처럼 분단의 매트릭스를 가로지르는 이야기의 힘을 발견한다. 이승우의 '미궁에 대한 추측'을 통해서는 권력의 바깥에서 가능한 상상의 비상을, 함정임의 소설에서는 해운대와 영도라는 장소성이 품은 글쓰기의 힘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문학 세계를 향한 깊고도 뜨거운 헌사를 건넨다.
지은이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문학 세계를 “고통의 법열(法悅)과 깊은 주문(呪文)”으로 정의한다. 2024년 10월 10일 저녁, 남도 여수의 병원에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했을 때 한강의 첫 소설집이 바로 '여수의 사랑'이었음을 떠올리고, 그 공교로운 인연에 깊이 놀란다. “텅 빈 항아리 되어” 역사의 고통을 온몸으로 울리게 한 한강 문학의 비밀을 비평의 언어로 풀어낸다.
지은이에게 비평이란 타자의 고통에 공명하고, 그 상처를 제 몸으로 앓으며 새로운 사유의 주름을 열어나가는 과정이다. 나스카의 주름이 수천 년을 지나 여전히 접히고 펼쳐지듯, 저자는 동시대의 문학예술 앞에서 여전히 끊임없이 새로운 비평의 주름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숭고의 주름'은 넘쳐나는 가벼운 감상들 사이에서, 비평이 어떻게 세계의 고통을 껴안고 새로운 윤리적 도약을 이뤄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뜨겁고도 서늘한 기록이다.
평론가 우찬제에게 독자란 이 시대를 함께 읽고 서로의 고통을 나누는 동료들이다. 세계의 균열을 기꺼이 제 몸의 주름으로 받아내는 '숭고의 주름'의 문장들은, 절망의 시대를 견디며 새로운 숭고를 탐색하는 이들에게 묵직하고도 다정한 언어로 남을 터이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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