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가운데]왕과 함께 산 여자

기사 대표 이미지

최근까지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가 큰 화제를 모으면서 단종의 비극적인 서사가 대중적으로 다시 읽히고 있다. 그 여파는 인기 관광지가 되어 지역을 활성화하고 있어 매우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단종을 둘러싼 국한된 주변 인물과 브로맨스적 서사에 집중하다 보면, 한평생을 가슴에 묻고 살았던 ‘정순왕후 송씨’라는 존재가 삭제된 듯하여 안타깝다.

단종은 열두 살, 정순왕후는 열세 살에 국혼을 맺었으나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준 뒤 상왕과 대비가 되었다. 사육신이 일으킨 거사로 다시 노산군과 부인으로 직급이 떨어져 급기야 생이별을 한 후에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가장 두렵고 힘든 시절에 서로 의지했을 두 사람에 대한 감정과 기록은 없지만 동지애와 연민이 있었을 것이다.

단종이 유배를 떠날 때 청량리 영도교에서 두 사람은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 단종은 유배지까지 가면서 그리고 유배지에서도 삶의 동반자였던 정순왕후를 몹시 염려하며 그리워했을 것이다. 궁궐에서 같이 숨죽이며 두려움을 견뎌낸 왕비와의 정분이 어찌 남아 있지 않았겠는가. 영월 유배지에서 두렵고 외로울 때마다 더욱 생각하였을 것이다.-물론 영화에서는 이런 내용이 한 컷도 나오지 않았다.

정순왕후는 여산 송씨로 정읍 칠보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옮겨가서 단종비가 되었다. 왕비가 되었다고 해도 당시 정세에서는 결코 경사가 아니었다. 이렇게 시작한 생은 온전할 날이 없었다. 영도교에서 어떤 말을 주고받았을까? 단종이 다리를 건너면서 ‘반드시 살아남으십시오.’라고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살아남으라는 말로 헤어진 정순왕후는 날마다 동망봉에 올라 단종이 유배간 동쪽을 향하여 읍하고 통곡하며 단종의 안녕과 명복을 빌었다. 동망봉은 서울 종로구 숭인동 낙산 동쪽 끝줄기 봉우리로 그가 통곡할 때면 그 울음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려, 인근 아낙네들이 함께 울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한편, 아쉬운 일은 일제강점기에 낙산의 맥을 끊고 경성에 근대식 건물을 짓기 위해 돌을 캐는 채석장으로 사용하여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이 담긴 흔적도 훼손되고 말았다. 특히 훗날 영조대왕이 정순왕후의 절개와 지조를 높이 사서 ‘동망봉(東望峯)’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겼으나 일제의 채석 과정에 사라진 것을 현재는 근처 바위에 재현해 놓았다.

정순왕후는 세조가 주는 곡식과 물품 일체를 거부하며 저항하였다. 남편을 죽인 숙부의 하사품을 거절하고 직접 노동을 하면서 길고 긴 생을 이어간다. 그의 생은 단종과 이별할 때 멈추어진 채로 새로운 신분으로 시작하였고, 스스로 선택한 삶의 자세는 품위와 당당함으로 저항하는 것이었다. 왕비였던 여인이 저잣거리의 여인들과 어울려 염색이라는 노동으로 연명하는 모습은, 권력의 정점에 있는 세조에게 가시로 작용했을 것이다. 정순왕후가 목숨을 부지하면서 가난한 여인으로 살면 살수록 세조가 저지른 왕위 찬탈은 지을 수 없는 얼룩으로 남았고, 그녀가 당당하면 할수록 백성들은 정순왕후를 도왔다.

정순왕후의 삶은 '사랑'으로 승화되었다. 18세에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정업원(현 서울 청룡사)에서 비구니가 되어 낮에는 자주동샘에서 옷감에 물들이는 노동을 하고 조석으로 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향해 절을 올렸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왕비였던 여인이 자급자족하며 부당한 권력에 타협이나 굴복하지 않고 자식 하나 없이 홀로 남겨진 64년이라는 긴 세월을 인내하며 의리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예는 없었다. 동망봉에 올라 영월 하늘을 바라보며 올린 예(禮)는 죽은 지아비에 대한 의리와 권력을 찬탈한 정의롭지 못한 시대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다. 정순왕후는 정신적으로 왕과 함께 산 여자로 그리움을 승화시켰다.

궁궐이라는 담장 안에서 벌어진 권력에 대한 암투는 승자의 기록으로 기억된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생과 기록될 수 없었던 삶은 정사(正史)에 남은 기록보다 진실을 증언하기도 한다. 사릉(思陵)에 잠든 왕후는 ‘사랑’으로 저항한 유산을 남기었다. 비극인 단종을 넘어, 비극을 품격 높게 살아낸 정순왕후를 역사 주인공으로 복원하자. /김현조(전주문인협회장)

💬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로그인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