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 호산(湖山)의 푸른 파도가 반기다

■[옛 자료에서 전북을 만나다] 완주 호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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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완주군 삼례 비비정에서 또다른 ‘나’를 만납니다. 나지막한 산 정상에 호산서원이 터를 잡고 그 아래 언덕에 비비정이 엎드렸습니다. 한내는 오랜 세월 말없이 유유히 흐르며 민족의 애환을 지켜보고 있으며, 바로 그 언덕에 자리한 비비정은 그 유래와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 깊었던 정자였습니다.

비비정마을은 조선 1573년(선조 6년)에 최영길이 창건한 정자를 관찰사 서명구가 훗날 중건, 관정이 된 정자 이름입니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비정기’를 보면, 우암이 무인으로서의 최씨 집안을 찬양하기 위해 장비나 악비 등 중국 명장의 이름을 끌어다 붙인 기지에 불과한 것이지 원래는 지명을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비정 가까이 한내 위에 소금배, 젓거리배, 돗단배가 오르내리면 눈부신 모래빛 반짝반짝 빛났으며, 모래찜을 하면서 한 잔의 술과 함께 얼큰해지면 노래 한 소절을 불렀던 여유. 바로 그윽한 정취를 느낀 우리 선조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아 비비낙안(완산팔경)이라 불렀습니다.

완주에 호수(湖)와 산(山)이 있는 경치 좋은 곳, 신선이 사는 곳이 있습니다. 완주군 삼례읍에 위치한 호산서원(湖山書院)에서 '호산(湖山)'은 일반적으로 '신선이 사는,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을 의미합니다.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풍경이 마치 신선이 살만한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비비정(飛飛亭) 근처의 수려한 자연 경관을 묘사하는 명칭입니다. 정몽주, 송시열, 김수항 등 절의와 덕행이 높은 선현을 모신 곳입니다.

그렇다면 호산(湖山)은 무슨 의미일까요. 보통 신선이 사는 곳을 호산(湖山)으로 부릅니다. 그래서 호산(湖山)이란 뜻은 고전에서는 신선이 살 정도로 경치 좋은 곳을 이르기도 합니다. 직역으로 하면 ‘호수를 끼고 있는 산’입니다. 풍초연(馮超然)은 ‘호산편주(湖山扁舟)’에서 “생계는 촌뜨기로 족하고(生計野人足) 뜬 이름 깨달은 사람에겐 가볍지(浮名達者輕) 조각배는 그렇게 또 오고가겠거니(扁舟往來慣) 갈매기와 물새는 서로 가여워하지 않네(鷗鳥不相憐)”라고 적었습니다.

새삼스런 자각은 미루거나 게을리 하는 사이 생각만으로 끝낼 때가 많지만, 속절없고 부질없다는 느낌이다. 속아 줄줄도 아는 것이 인생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살다 보면 남이 나를, 때로는 내가 나 자신을 실망시키기도 합니다. ‘호산객잔(湖山客棧)’은 아름다운 풍광을 둘러싼 동정호 일대를 나타내며, 소동파의 ‘초연대기(超然臺記)’는 ‘호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버려두고(背湖山之觀) 뽕나무와 삼이 자라는 들을 거닐게 됐다(而適桑麻之野)’로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남루가 자리한 곳이 '제일호산(第一湖山)'이며, 이삼만의 제자 서홍순의 호가 호산으로, 바로 그것입니다.

비비정 아래 길 옆 바위에 ‘호산청파(湖山淸波)’라고 새겼으니 응당 푸른 파도가 비비낙안(飛飛落雁)을 만들었겠지요.

호산서원 바로 아래에는 호산서원 중수사적기, 호산서원사적비, 전 참봉 박영옥(朴永玉) 찬송비 등 3개의 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비석 아래로 발길을 옮기면 ‘산앙재(山仰齋)’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만경강의 일부를 전망할 수 있어 막혔던 가슴이 툭 트임은 물론 바위틈에서 난 무성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는 등 경치가 아름다워 그 이름도 ‘산앙(山仰)’입니다.

‘산앙(山仰)’은 바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본다는 뜻이며, ‘고산앙지(高山仰止)’의 줄임말입니다. 시경 거할(車舝)편에 “높은 산을 우러러보며 큰길을 가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나오는 만큼 존경할 만한 선현(先賢)을 사모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산앙재는 특히 암키와와 숫키와 여러 장이 조화로움을 뽐내는 꽃담(합각)은 삼례 사람들의 넉넉한 마음과 빼어난 조형성에 입이 다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비비정 바로 뒤의 호산서원(湖山書院)이 언제 누구에 의해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1868년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리어지고 없어졌던 것을 일제시대에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6.25사변으로 말미암아 서원 안의 산앙재와 강당이 불에 타 없어진 뒤 1958년, 여러 사람들과 이존화 등이 중심이 되어 100만환을 내놓아 1958년 복원 및 중건했습니다.

서원의 누렇게 변한 나무의 속살이 고색창연함을 더해줍니다. 반드시 코로만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이제라도 나비가 내려앉을 듯 생생한 그 꽃송이 하나하나에선 당신닮은 향기가 묻어납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나무의 화려함은 변화가 없는 것처럼, 은은하게 향기를 우려내는 호산서원의 꽃담처럼, 아름다운 마음 고이고이 간직한 채 곱디곱게 늙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호산청파(湖山淸波, 전 송시열)’란 글귀의 속뜻을 음미하면서 당신이 지금, 내 주름을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주기를 간곡히 부탁하면서 정치를 잘해 국민들이 이같은 풍경을 맘껏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비정(飛飛亭) 뒤편에서 만경강을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 산앙재기(유재 송기면)



이 재실은 호산서원(湖山書院)의 유생들이 강학(講學)과 재계(齋戒)하는 곳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일을 마치고서 재실의 선비, 송장섭(宋璋)이 여러 선비의 뜻으로써 나에게 기문을 청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감히 붓을 적시지 못하다가 이에 한숨을 쉬고서 탄식하며 말했다. 곡삭(告朔)에 올리는 제물(祭物), 염소를 남겨두는 것은 예를 보존하기 위함이다. 만일 이 재실로 인해서 글 읽는 소리가 들려 다시 노나라, 추나라의 풍속을 이룰 날이 있을까. 삼가 생각건대, 벽옹(辟雍), 반궁(泮宮)은 학문을 권장하기 위한 외형물이고 도덕, 예의는 선비를 만들어내는 실상이다. 앞서 본 서원에 모셔진 네 분 선생(鄭圃隱, 宋尤庵, 金文谷, 金鳳谷은 즉 정몽주, 송시열, 김수항, 김동준)의 일로써 말하고자 한다. 그들의 심오한 학문과 뛰어난 절개가 저처럼 높고 높아서 우뚝한 산과 같이 우러러보며 후세의 추앙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니다. 주야로 게으르지 않고 강론했던 것은 육경(經), 사서(四書)의 책이며 종신토록 실천하며 감히 어기지 않았던 것은 성경(誠敬), 신독(愼獨)이다. 이 때문에 그 생각하고 조처한 바는 세도(世道)에 있어서는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정학(正學)을 높임이며 조정에 있어서는 공리(功利)를 멀리하고 충의(忠義)를 다하여 목숨을 바치면서도 후회가 없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그 의리가 마음에 쌓인 바 중후한 까닭에 바깥에서 이르러 오는 화복(禍福)이 그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이에 종사하는 많은 선비들이 네 분 선생께서 하신 일을 살펴보면 스스로 닦을 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속의 비방, 일신의 진퇴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서로 더불어 경전을 강론하고 익히되 부지런히 하고 조심하여 오직 몸과 마음을 진실하게 하고 뜻과 기운을 격려하여 반드시 그 예의를 유지하고 그 실마리를 계승하여야 만이 네 분 선생의 후학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만일 비바람을 막는 것과 변두(籩豆)에 잘못이 없는 것으로 우리의 일을 마쳤다고 생각하면 이는 지엽적인 것이다. 중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록이 있기에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 삼례 호산사기(고재 이병은)



완산(完山, 전주의 옛 이름)은 호남의 큰 고을이다. 그런데 호산(湖山)의 경치는 전주 안에서도 대적할 곳이 없으니, 산이 우뚝 솟아 강물에 임해 있는 곳이다. 그 시내에는 윤환(輪煥)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평평한 산의 양지바른 곳에는 안향(安享)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곳은 송시열(宋尤庵) 선생과 김문곡(金文谷) 선생 등 여러 선생이 노닐던 곳이다. 그 좌우엔 바위벽이 깎아지른 듯 기이하게 솟아 있고, 멀고 가까운 여러 봉우리들은 마치 비단 병풍을 둘러친 듯 눈앞에 벌여 있으니, 어찌 늙은이가 (즐기며 살기에) 족한 곳이 아니겠는가. 옛날에 서원을 세운 것은 오직 산림의 빼어난 경치만을 차지하려 함이었겠는가? 예전 남곽(南郭, 정제두) 선생이 이 고을에 머물 때 그 경치를 사랑하여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우암 송시열 선생 역시 그 명성을 듣고 이곳에 올라 즐기셨다. 문곡 김창협 선생 또한 일찍이 이곳의 도(道)를 칭송하였으니, 이처럼 훌륭한 선생들이 즐기던 곳이다. 이분들의 은택은 산천과 풀나무에까지 미쳐 사람들이 우러러보며 공경하고 그 공덕을 잊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풍속이 변하고 학문하는 이들이 줄어들어 성리학의 가르침이 희미해졌다. 특히 우암 송선생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대의를 오로지 실천하셨는데, 세상이 어지러워지며 사당이 훼철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마음을 모아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훌륭한 분들을 모신 사당이 이토록 황폐해지도록 내버려 두겠는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백만 전(錢)의 자금을 모으고 장인을 불러 사당을 다시 짓고 위패를 정성껏 모셨다. 이것은 비단 옛것을 답습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자와 주자로부터 이어져 온 바른 학문의 길을 밝히고 후학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세상의 도(道)가 쇠퇴함에 따라 흥하고 폐함이 일정하지 않으니, 이미 (사당이) 훼철됐다가 다시 쌓기도 하고, 혹은 무너진 담장을 다시 세우기도 하며, 사당의 옛 터에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이처럼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으나 우리 선비들은 스스로 능히 개탄하며 이 전통을 잇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여 논의하기를, "사당이 거의 비게 되었으니 어찌 그대로 두겠는가"라고 했다. 마침내 이존화(李存華) 등 여러 인사가 마음을 모아 관전(官錢) 백만 전을 내놓고 장인에게 맡겨 사당을 중건했다. 날을 잡아 위패를 다시 모시니, 이는 공자와 주자의 도를 따르는 것이요, 바르지 못한 길을 버리고 참된 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동방의 대현(大賢)이신 여러 선생을 모시는 이 일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다행히 이 세상에 어진 이들이 있어 그 뜻을 굽히지 않고 때에 맞춰 이 일을 이루어내었다. 어떤 이가 나에게 이 일을 기록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나는 병이 깊고 재주가 없어 사양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중심을 잡아 기록할 이가 없어 자칫 잊힐까 두려워, 마침내 붓을 들어 그 전말을 기록하노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러하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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