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와사고(敬窩私稿, 지은이 엄명섭, 번역자 엄찬영박사, 펴낸 곳 금산서사)'가 한글로 번역됐다. 선생의 탄신 120주년을 맞아 후손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이번에 펴냈다.
이는 근대 유학자 경와(敬窩) 엄명섭(嚴命涉, 1906~2003)의 문집으로, 그의 시와 글을 수록한 책이다. 전체 6권 2책엔 한시 1, 252제, 1,309수, 간찰 270편, 잡저 128편, 묘도문 106편이 실렸다.부록 보선록(輔善錄)엔 1,347명의 제자 명단이 실려있다.
'술로 장풍(腸風)이 났는데 붕어탕 한 그릇을 먹고서 큰 효과를 봤기에 절구 한 수를 지어 잊지 못할 마음을 부침'
엄명섭
기질 병약한 이 몸은 병이 많으니
늘 약물을 찾아 기다림이 많다네
장풍을 낮게 하여 그대가 고맙고
한자가 넘는 가는 비늘이 효과는 참 많구나'
이 시는 1955년 3월 21일 선생이 지었다. 붕어탕은 부어탕(鮒魚湯)으로 나온다.
'분발해 힘씀
귀와 눈이 총명해 이 몸에 갖춰져 있으니
책을 가슴에 품은 나에게 어찌 가난하다 하겠는가
심신을 절로 풀어놓으면 안으로는 마음을 속인 것이요
명실을 크게 부풀리면 밖으로 사람들에게 부끄럽다
평소 구태 버리지 못하면 악행이 맥에 머무르고
조금이라도 교만하고 나태하면 병이 뿌리에 생기네
오늘날 시에 적은 이야기를 하늘에 맹세하리니
반백 년 남은 삶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으리라'
선생의 한시는 초학자에게 지어준 칠언절구가 다수를 차지한다. 시의 내용은 자신의 경학정신에 입각한 성학에의 열망, ‘경’의 공부, 권학으로 초학자가 학문에 임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그는 국권이 상실되고, 도학이 멸절되어가고, 좌우익 이념이 대립한 근현대를 살았다. 그는 단발령을 피하여 평생 보발 하였고 의관정제 하는 선비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그는 근현대 유학자의 외길을 오롯이 걸으며 경학이 단절되어가는 현실을 두 눈으로 보며 자신의 경학세계가 사라져가는 안타까움을 호학하며 초학자를 가르침으로 삭여 한시로 대변했다.
선생의 본관은 영월(寧越)이고, 자는 성솔(性率)이며, 호는 경와(敬窩)다. 엄주용(嚴鑄容)과 충주 지씨(忠州池氏) 지용재(池龍載)의 딸 사이에서 1906년 3월 10일 전남 곡성군 입면 금산 285번지에서 4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일찍이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에게 수학해 '사서삼경집주언해(四書三經集註諺解)', '소학집주언해(小學集註諺解)', '독서기의(讀書記疑)' 등의 저서를 남겼다. 훗날 문집으로 간행하기 위해 시와 산문 등 문체별로 손수 적어 정리한 6권의 필사본이 현재의 '경와사고(敬窩私稿)'다.
전주향교 등에서 강학활동, 그리고 향촌 곡성에서 유학의 부흥과 보급에 노력했다. 학문에 대한 그의 자세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귀감이 될 뿐 아니라, 근현대의 역사와 문화, 유학자로서의 모습 및 가치관 등을 이 책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현대까지 유학의 이념과 가치를 올곧게 지키며 학문을 닦은 도학자였다. 해방 후 학문이 완성되어가는 불혹에 전주 옥류동(玉流洞)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금재(欽齋) 최병심선생을 찾아가 예를 올리고 가르침을 청했다. 1960년대 장수군 번암면 대성산방(大聖山房), 1970년~80년대 전주향교 명륜당과 동재, 1990년대 전주 송천동에서 송천서사(松川書舍), 우가재(尤可齋)에서 교학 활동을 했다.
2000년 다시 전주향교에서 두어 해를 머무르며 초학을 지도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2003년 98세의 일기로 교학을 마쳤다.
선생은 공교막부(孔敎莫負) 네 글자를 사명으로 삼고, 항상 사무사 무불경(思無邪 無不敬=생각함에 사특함이 없고, 공경치 아니함이 없다) 여섯 글자는 몸에 가까운 벽에 걸어 놓고 일상에서 실천했다.
번역자 엄찬영 박사는 곡성에서 초․중․고를 나와 1991년 군복무를 마치고 전주향교에서 후학을 지도한 엄명섭선생을 13년간 모시면서 가학으로 한문 공부를 해왔다. 그는 선생의 손자이다.
한국방송통신대 전북지역학습관에서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전주대 교육대학원 한문교육학 석사에 이어 조선대 대학원 고전번역학과에서 '십성당집 국역'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송암집'(공역, 2019), '아야 공부해라 훌륭한 사람이 되면 효도는 절로 이루어지니라'(2019), '남유록'(공역, 2019), '선현들의 시문 속에서 나주를 읽다'(공역, 2021), '영남 밀양 선비의 호남 나주 나들이' (공역, 2021), '경와시선(공역, 2024) 등이 있다.
현재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의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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