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묵호자 전충효가 무장현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중기 회화의 특징은 중국 절파(浙派) 화풍의 유입과 확산으로 규정할 수 있다. 중국 절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대진(戴進) 화풍의 수용 양상을 통해 조선 중기 절파계 화풍의 형성 과정을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절파(浙派)는 중국 명대에 회화 중 주로 산수화에서 오파(吳派)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탄생한 저장성(浙江省,) 항주(杭州) 출신의 대진(戴進)을 시조로 하는 직업화가의 일파를 말한다.
절파 화풍의 특색은 절강지방의 전통적 수묵법을 기반으로 하고 필묵이 거칠고 자유분방하며, 점경(點景) 인물의 극적인 표현과 묵면(墨面)과 여백의 대비, 율동감 등을 강조하는데 있다. 하지만 웅건(雄健)하고 뛰어난 필치의 표현 과잉으로 오히려 부산스럽고 딱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먼저 인․숙종기 문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국의 절파 관련 화가들은 왕악(王諤) ․ 주단(朱端) ․유준(劉俊) ․ 왕세창(王世昌)이다. 기록과 작품을 통해 화풍상의 영향관계를 살펴보면 왕악은 이경윤⋅이징⋅전충효의 산수화에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전남 화순군 이서면 보산리 석정마을에 살던 석정처사(石亭處士) 김한명(金漢鳴, 1651-1718)은 호남에서 이름난 화가 전충효(全忠孝, 17세기 활동)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는 전충효는 김한명이 살던 실제 공간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단순한 산수화도, 그렇다고 지도를 그린 것도 아닌 회화적 질서 속에서 재구성한 그의 유거지를 한 폭에 담아냈다.
사대부가의 사적인 소유지를 다룬 그림을 별서도(別墅圖)라고 한다. 처사 또는 유거도(幽居圖)라는 화제를 사용하여 산수에 은거하는 선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집안의 소유지를 기록하는 한편 주변의 명승과 명소를 담아낸 그림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림은 기록화적인 면모와 함께 감상적, 와유적 측면을 함께 보여준다..
16세기 이후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며 정치·사회가 불안정해지자, 가문의 소유지나 별서를 시각화하여 후대에 전하려는 수요가 증가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별서도는 전북 남원에 있는 사계(沙溪) 방응현(房應賢, 1523-1589)의 거처를 그린 ‘사계정사도(沙溪精舍圖)’이다.
이 그림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정사를 복원한 뒤, 손자 방원진(房元震)이 1609년에 기념으로 제작했다.(김소영 한국학호남징흥원 책임연구원)
전충효는 17세기 호남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이다.
'근역서화징'에 “호는 묵호(墨豪)이고 그림을 잘 그렸다”라거나, ‘한국회화대관’에 영모·절지에 능한 화가로 소개되었다. 출신과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제한적이지만 그가 호남에서 활동하며 이곳에 부임한 지방관들이나 지역유지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리던 이름난 화가였음이 확인됐다.
유계(兪棨, 1607-1664)의 '시남집(市南集)'에 자신이 전라도 나주의 무안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1646-1648) 화사 전충효에게 이일상(李一相, 1612-1666)이 금성, 즉 무안으로 만나러 오는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고 한 기록이 있다. 김하천(金廈梴, 1621-1677)의 '삼매당집(三梅堂集)'에도 ‘호남에 墨豪子라는 화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는데 長沙(지금의 전북 고창)에 와서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석정처사(石亭處士) 김한명(金漢鳴, 1651~1718)이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보산리 석정마을에 은거하며 후학을 지도했던 당시의 유거지를 그린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는 전충효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회화식(繪畫式) 지도(地圖)처럼 그려졌으며, 속세와 분리된 사대부의 유거지를 풍수지리적으로 접근해 그렸다.
이상의 사례로부터 전충효가 17세기 중후반에 주로 호남 지방에서 활동한 직업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현전하는 작품으로는 개인 소장
'소상팔경도'는 종이에 수묵담채로 그려졌는데, 안견파(安堅派) 화풍과 절파(浙派) 화풍이 절충된 경향을 보여준다. '괴석초충도(怪石草蟲圖. 서울대학교 박물관)'는 검은 비단에 금니(金泥)로 그려졌다.
창강 조속은 그의 아들인 조지운을 비롯, 전충효(全忠孝), 이함(李涵), 이하영(李夏英) 등에게로 그림 계보가 이어졌다.
'조속 초서 창강필적 (趙涑 草書 蒼江筆蹟)'은 보물이다. 조속(1595~1668)이 벽성군수(김제군수)로 재임하던 1646년(인조 24) 7월에 당시(唐詩) 오언ㆍ칠언율시 등을 대중소로 크기를 달리하여 쓴 것이다.
임피현령을 역임한 조선 후기 시서화(詩書畵)의 대가인 창강(滄江) 조속(趙涑, 1595~1668)을 임피현으로 유배왔다.
조속은 임피현령을 지냈고, 김제군수로 일하던 때는 이 지역 송일중의 스승으로, 국내 최초의 금석자료를 수집 정리한 ‘금석청완(金石淸玩)’을 펴냈다.
벽성은 전북특별자치도 김제(金堤)의 옛 이름으로 당시 조속은 김제군수로 재임하고 있었다. 재임 기간은 1645년 4월 22일~1649년 3월 28일 무렵까지이다.
전충효가 무장현에서 어디에서 살았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이 고장 출신 고창 무장현출신 궁중 화원 이형록(李亨祿,1808~1883년)의 거주지는 또 어디였을까./이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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