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1 설탕단풍나무를 심어놓은 산에서 바라본 마이산. 마이산은 부부처럼 다정하게 서있다고 하여 부부봉이라고도 부른다. 왼쪽이 숫마이산, 오른쪽은 암마이산. 사진 아래쪽이 치유농원을 조성하려는 임야이다.
지난 3월 정년 퇴임후 안양과 진안을 오가며 귀촌 귀산을 준비하고 있다. 퇴임 1년 전인 지난해에 귀촌 결심을 굳히고 2주에 한번 정도 내려가 나무를 심고 농사도 짓고 있다. 서울 생활을 한 지 40여년 만에 고향에서 펼치는 나의 ‘인생 2막’이다. 무대는 마이산 도립공원 북쪽 진안읍 외사양 마을. 증조부때부터 터를 잡은 이 마을에서 내가 태어나고 초등학교 가기까지 코앞에 있는 마이산을 보며 자랐다. 방학때면 어김없이 달려가서 시골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함께 어울렸던 놀이터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거쳐 나에게까지 내려온 밭(500평 규모)에 자두, 복숭아, 꾸지뽕 등을 내손으로 심었다. 한 귀퉁이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어 연근을 키우고 미꾸라지도 풀어두었다. 마이산 자락에 있는 산(2만여평)에는 진안군청이 경관조성 목적으로 3월에 식재한 설탕단풍나무(메이플)가 자라고 있다. 공교롭게도 내 퇴임하는 달에 행사가 열려 나는 정년퇴임 기념 식수로 여긴다.
내가 쉽사리 귀촌을 결심한 것은 그럴 듯한 명분과 후원자가 있기 때문이다.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고 시간도 보내고 평소 꿈꾸던 정원도 꾸며보고 싶다. 올해로 87세의 고령이지만 아직도 농삿일을 주도하실 정도로 건강하다. 솔직히 나는 옆에서 거들기만 하면 된다.
그동안 나는 나름대로 귀촌 준비를 잘 해왔다고 자부했다. 과천서 주말농장을 분양받아 수년간 각종 야채를 지어보았고, 조경 등 관련 자격증도 땄다. 8년 전에는 임업후계자로 선정됐고 최근까지 200여시간에 이르는 귀농귀촌 교육까지 받았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자신감은 현장에서 무참하게 깨졌다. 내 지식과 경험은 그야말로 장난에 불과했다. 지난해 300여평 규모의 밭에 재래식 방법으로 콩농사를 지어보면서 실감했다. 난생 처음해보는 콩타작은 정말 힘들었다. 콤바인이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라서 콩대를 직접 낫으로 베야 했다. 예전에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콩대를 쌓아 도리깨질을 했으나 우리에게는 마당도 멍석도 도리깨도 없었다. 궁리 끝에 길 위에 비닐을 깔고 콩대를 몇 겹으로 쌓아둔 후 승용차로 10여 번씩 왕복해보자는 아이디어를 아버지가 냈다. 콩이 뭉개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콩껍질 속에서 잘 마른 콩들은 신기하게도 잘 빠져나왔다. “오호~ 이런 방법이 있었네.”
다음 공정은 흙과 콩깍지 등 이물질까지 섞인 걸 한 곳에 모은 후 콩을 골라내는 작업이다. 이것도 쉽지 않았다. 전통 농기구인 키와 채반으로 까불고 흔들어 정선하는 원시적 방법을 동원했다. 이틀동안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얻은 수확물은 메주콩과 서리태 약 50㎏. 값으로 치면 아무리 높게 잡아도 60만원 정도이다. 콩씨를 뿌린 후 수확하기까지 들어간 비용을 생각하면 인건비도 안 된다.
어디 이뿐인가. 지난해 심은 자두나무 50여주를 돌보는 것도 쉽지 않다. 4월부터 잡초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처음엔 손으로 뽑을 만했지만, 얼마안가 딱딱한 땅에 단단히 뿌리박은 놈들을 낫으로 잘라야 했다. 뿌리가 남은 채 잘린 풀들은 며칠 후 더욱 왕성하게 보란 듯이 자란다. 식물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생존본능 때문에 더 빨리 성장하고, 억세지고, 퍼진다고 하더니 이 이건 식물 ‘좀비’가 틀림없다. 실제로 개화 결실을 촉진시키는 방법으로 유실수도 줄기에 환상박피를 하거나 뿌리를 자르는 것도 이런 원리이다. 좀비들과 육탄전에서 잇단 참패후 화학전으로 전술을 바꿨다. 생각 같아서는 고엽제에 버금가는 맹독성 제초제를 쓰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친환경 제초제를 뿌렸다. 2, 3일후 풀잎들이 노랗게 변하며 비실대는 걸 보면서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고작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 아니 약을 뿌린 사람을 비웃듯 더 크게 자랐다. 내가 본 극강의 좀비 식물은 환삼덩굴과 돼지감자이다. 이놈들은 비닐로 덮인 땅에서도 송곳구멍만한 곳만 있으면 가장 먼저 비집고 나와 금세 뻗어나간다. 다시 낫과 괭이를 들고 육탄전을 벌어야 했다. 베스트셀러 ‘야생초 편지’로 유명한 황대권씨는 잡초가 땅을 고슬고슬하게 해준다고 하여 두 번째 책 제목을 아예 ‘고맙다 잡초야’라고 붙이기도 했지만 자연농법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통할 말이다.
배수로 작업은 일종의 체벌처럼 느껴진다. 해야할 일을 안했거나 잘못했을 때 받는 벌 같다. 삽과 괭이로 바닥깊이를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자칫하면 처음부터 다시 파야 한다. ‘애초에 나무를 심을 때부터 둔덕을 높여서 심었으면 이런 고생 안했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때는 빨리 끝내려는 욕심 때문에 구덩이 파고 나무 꽂아 넣기에 바빴다. 농삿일이라는 게 기초부터 철저히 하지 않으면 그 다음엔 몇 배나 되는 고통으로 돌아온다는 걸 절감했다.
그렇게 뼈 빠지게 일했건만 3년생 자두나무엔 자두가 열리지 않았다. 올봄 자두꽃이 핀 다음에 추운 날이 이어져 꽃이 거의 떨어졌고 서너 개 매달린 자두도 벌써 벌레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유난히 병치레가 많은 자두나무는 1달에 최소 두어 번 각종 약을 뿌려야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초보자일수록 이런 ‘변견’ 훈련을 피해갈 수 없다. 만약 생계용 농사였다면 굶어죽기 십상이다.
농장에 다녀온 날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지고 말지만 며칠만 지나면 손길이 닿았던 곳이 궁금해진다. 게다가 올해부터는 슈퍼오디와 꾸찌뽕이 그런 대로 잘 커서 기쁨을 주고 있다. 봄에 심은 설탕단풍나무 묘목에서 커다란 단풍잎사귀가 매달린 게 마냥 귀엽고, 서너 달 만에 2~3배씩 키가 크는 것도 신기하다.
또 아버지와 함께 하는 손발을 맞춰 일하는 시간이 기다려진다. 20여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시는 아버지와 둘이서만 그렇게 긴 시간을 지내는 게 어색하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다.
나의 목표는 이곳에 나무와 약초, 나물 등을 재배해서 생산-가공-유통-체험 교육까지 이어지는 6차 산업 개념의 치유농원 시설을 세우는 것이다. 외사양 마을은 지금까지 수백억 원이 투입된 관광체험마을로서 기반 시설까지 갖추어진 만큼 이러한 형식의 농원이 조성된다면 관광객들을 머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는 인생삼락을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 하늘과 사람들에 대해 부끄럽지 않은 것,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을 삼락으로 꼽았다. 조선 중기 선비 신흠은 문을 닫으면 책을 읽는 것, 문을 열면 좋아하는 손님을 맞는 것, 문을 열고 나서면 산수를 즐기는 것이라 했다. 다산 정약용은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돼서 오는 것,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서 오는 것, 혼자 외롭게 찾던 곳을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려 오는 것이라 했다.
나는 어린 시절 뛰놀던 마이산 자락에서 생활하는 것, 거기서 키운 농작물과 약초를 맛보는 것, 지인이나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노는 것이 인생 2막에서 기대하는 삼락이다. 그래서 농원 이름도 삼락원으로 지었다. 앞으로 귀농귀촌하여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소소한 경험과 문제점, 주변에서 만난 성공담과 실패담을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담아볼 생각이다.
/최진환(전 언론인)
필자 소개
전주 영생고 출신으로 서울대 신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9년~2000년 미국 컬럼비아대학 동아시아센터 방문연구원으로 연수했다. 한국일보 정책사회부장, 문화부장, 대외전략실장. 논설위원 겸 신문에디터를 지냈다.

그림2 설탕단풍나무 조성지에서 내려다본 사양제. 줄맞춰 꽂아놓은 흰 표지목은 설탕단풍나무가 있다는 표시이며 나중에 풀베기를 할 때 조심하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림3 자두나무가 잡초와 뒤섞여 자라고 있다. 잡초가 나무보다 크지 않게 하는 게 목표였다. 이를 위해 3월부터 7월까지 노동력의 70%를 쓴 것 같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피어있는 화사한 백합꽃이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준다. 앞쪽에 줄맞춰 심은 설탕단풍나무 묘목은 줄기가 젓가락만 하지만 큼직한 단풍잎이 매달려 있어 앙증맞다.

그림4 진안 고향마을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밭에 자두나무 50여주와 복숭아, 꾸찌뽕, 슈퍼오디 등 유실수와 백합, 작약 등 화훼가 자라고 있다. 보기엔 엉성하지만 3년 전부터 흘린 땀과 노력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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