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제가 왔습니다. 자식들 낳으면 잘 자라라고 기도 많이 해주신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제가 아들딸 낳아서 데리고 왔습니다. 어머니, 부디 우리 아이들 무탈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지켜주세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산 중에 계신 시어머니께서 손을 흔드는 걸까. 오월이 되고 송화가 날릴 때면 우리 가족은 약속이나 한 듯 시어머니 산소를 찾는다. 평소 목련을 좋아하셨다는 시어머니 산소 앞에 나무를 심으며 박목월의 ‘4월의 노래’를 즐기셨다는 얘기를 덤으로 듣는다. 어머니를 추억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들려주는 남편의 레퍼토리 중 하나다. 결혼하고 천 번도 넘게 들었을 것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할머니를 뵌 적 없는 아이들도 열심히 나무에 물을 주며 남편을 돕는다.
살아생전 성품이 넉넉하셨다는 시어머니는 내가 결혼하기 일 년 전에 영면하셨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남편의 상실감은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저릿하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더구나 삼 남매 중에 큰아들인 아이 아빠를 무척 아끼셨다니, 그분의 가르침이 더 궁금해진다. 살아 계실 제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신앙심이 깊으셨다는 어머님이 자주 듣던 음악은 무언지, 어떤 꽃을 좋아하셨는지 밤새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포슬포슬 흙살이 보드라운 5월은 손발이 바쁜 계절이다. 산 아래 군데군데 다랑논에서는 벌써 모내기가 한창이다. 소로엔 누가 뿌려 놓은 듯 보라색 달개비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논둑에 핀 하얀 냉이 꽃이 봄 공기를 가늘게 흔들자 알싸한 송진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꽃대를 한창 치켜세운 송화는 수꽃이 피었던 나무초리에 암꽃이 피는 습성을 지녔다. 그 본향이 마치 지고지순한 부부의 정을 느끼게 한다. 어느새 굴참나무 우듬지에도 따뜻한 숨이 돌고 파릇파릇 연녹색 잎사귀마다 선물이다. 우리네 삶도 자연의 섭리처럼 봄이 오면 움이 트고 잎사귀가 돋아나듯 새로운 삶을 준다면, 꽃처럼 나무처럼 겸손할 수 있을까? 바람과 물살에 순응하며 아끼고 사랑하며 베풀 수 있을까.
형제 중에 시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았다는 남편은 나이가 들면서 시아버지를 더 닮았다. 신문지 한 장도 단물나게 쓰시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남편은 환경이 전혀 다른 나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교차점이 다른 물줄기가 진폭을 넓혀 강을 이루듯 남편은 나를 아내에서 엄마로, 엄마에서 친구로 성장 시켜주었다.
"당신이 염색해 주면, 십 년은 더 젊어 보일 거야. 이제 남편도 나이를 먹는 게다. 뒷자리에 앉아 계신 시아버님은 아랑곳없이 당당하게 애정 표현을 한다. 죽을 때까지 가족을 챙기며 알뜰히 사랑만 하리라. 어느덧 끝까지 닮기 싫다던 시아버님의 버릇을 그대로 닮은 그 사람이, 그의 아들딸과 나란히 걷고 있다.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가 되어서….
박경숙 수필가는
전주 출생으로, 2016년'계간수필'에서 수필 추천 완료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행촌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집'미용실에 가는 여자' 발간
전북수필문학상 수상, 산호문학상 수상
전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역임, 현재 전북문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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