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3년 07월 10일 14시28분
[아침발걸음] 고리짝도 쓸모가 다 있다
‘고리짝 같은 소리’는 한번씩 들어봤을 것하다. 고리짝은 버들고리나 대오리로 엮어 만든 옷상자를 말한다. 가볍고 뚜껑이 있어서 시골에서 물건을 보관할 때 주로 사용하였다. 그물처럼 엮은 버들고리나 얇게 켠 대나무로 엮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틈새가 생겼고, 여기에 한지를 바르거나 천을 붙여서 물건을 보관할 때도 사용하였다. 요즘에도 대나무로 만든 채상이나 버들고리로 만든 피크닉 광주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천으로 만든 간단하게 쓰는 세탁물 바구니, 플라스틱으로 만든 리빙박스 같은 제품으로 점차 변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리짝은 ‘낡고 진부한 것’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한다. 집을 고치거나 이사할 때 버려지는 것도 대부분 이런 고리짝이다. 그런데 이런 고리짝도 혹시 몰라서 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작년에 순창에 있는 순창설씨 종중소장 자료에서 호남 군적부(軍籍簿)가 발견되어 학술대회를 진행한 일이 있었다. 그 대회를 주관하였던 교수가 설씨 종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며 소장 고서를 살피던 중에 ‘동의보감’이나 ‘자치통감’ 등 고서를 포장한 종이에서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 우연한 발견이다.
얼마 전에 이런 우연한 발견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임실군 삼계면에 갔다가 망가져 버려진 옷고리짝에서 글씨가 써져 있는 종이를 모두 뜯어냈다. 바닥 부분에 있는 종이는 다 헤져서 뜯어내는데 어렵지는 않았다. 서너 시간에 걸쳐서 하나하나 분리해냈다. 온전한 문서도 있었고, 조각 문서도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문서도 있었다. 아마도 집안에서 보관해오던 고문서를 고리짝을 만들면서 덧붙였던 것 같다. 사용가치가 사라진, 오래된 문서이니 그럴 만도 하다.
수북히 쌓인 고문서를 며칠에 걸쳐서 조심스럽게 폈다. 물을 먹이면 팽팽해지는 한지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글씨를 읽고 내용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고리짝을 사다가 본인이 직접 종이를 바를 수도 있지만 남이 만든 것을 사올 수도 있기 때문에 그 내용이 어떨지 자못 궁금하였는데 대부분 임실군 삼계면에 살고 있던 풍천노씨 집안의 고문서이다.
이렇게 찾은 고문서가 매매문서류 29건, 소지류 14건, 수기 1건, 간찰류 13건, 그리고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조각 고문서 등 50여 건의 고문서였다. 만지는 것도 조심스러운 이런 고문서는 사진을 찍고, 그 사신을 보면서 내용을 정리한다. 그러다 보면 조각 고문서들도 퍼즐처럼 맞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고문서들은 대략 18세기 초부터 19세기에 걸쳐 생산된 고문서들이었다. 1747년 매매문서는 유속(柳遫)이 유학 이철에게 아산방에 있는 채자답 4두락지, 와가 17칸, 초가 7칸, 대문 2칸, 점가 2칸, 감나무 5주, 밤나무 70주, 뽕나무 20주, 주경목 2주, 호두나무 1주, 집뒤의 송추(松楸) 등을 매매하는 내용이고, 1800년 12월 30일에 작성한 매매문서는 죽곡에 사는 노생원댁 명문으로 만취정(晩翠亭) 이자(李字) 집터[垈田]를 파는 내용이다.
아산방은 조선시대 남원부 48방 가운데 하나이고, 1906년 둔덕방, 아산방, 말천방, 돌고개방, 오지방, 영계방 등 6개방이 임실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둔덕방은 둔남면이 되었다가 오수면이 되었고, 아산방, 말천방, 돌고개방, 오지방이 합쳐져서 오늘날 삼계면이 되었다. 영계방은 이때 순창군에 다시 편입되었다.
삼계면은 한때 밤이 유명했었다. 1924년 허주라는 사람이 식율사(植栗社)를 조직하여 삼계면 일대에 밤나무 단지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삼계면에는 밤나무가 많다. 이 매매문서에서 밤나무 70그루를 파는 내용이 새삼스럽다. 만취정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서 1983년에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곳이다. 만취정 김위(1532~1595) 선생이 세운 정자로 알려져 있다. 김위 선생은 경주김씨 후손으로 1580년 영위사(迎慰使)로 활동할 때 만취정이라는 호를 받았다고 한다.
1700~1800년대 남원부 아산방 지역의 풍천노씨, 경주김씨들 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고리짝에서 시작된 인연을 조심스럽게 풀어볼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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