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란탕, 청포채에다 겨자, 고추, 생강, 마늘, 문어, 전복 봉을 오려 나는듯 괴어놓고, 전골을 들여라’
옛 이야기로 전북을 만나다:춘향전의 음식
감홍로, 청실배 등 각종 음식 소개돼
춘향모 기가 차서 “양반이 그릇되매 간롱조차 들었구나.” 어사 짐짓 춘향모의 하는 거동을 보려 하고 “시장하여 나 죽겠네. 나 밥 한 술 주소” 춘향모 밥 달라는 말을 듣고 “밥 없네” 어찌 밥 없을꼬마는 홧김에 하는 말이었다. 이때 향단이 옥에 갔다 나오더니 저의 아씨 야단 소리에 가슴이 우둔우둔 정신이 울렁울렁 정처없이 들어가서 가만히 살펴보니 전의 서방님이 와 계(시)구나. 어찌 반갑던지 우루룩 들어가서 “향단이 문안이오. 대감님 문안이 어떠하옵시며 대부인 기후 안녕하옵시며 서방님께서도 원로에 평안히 행차하시니까”
“오냐. 고생이 어떠하냐”, “소녀 몸을 무탈하옵니다. 아씨 아씨 큰 아씨. 마오 마오 그리 마오. 멀고 먼 천리 길에 뉘 보려고 와계(시)관대 이 괄시가 왠 일이오. 애기씨가 알으시면 지레 야단이 날 것이니 너무 괄시 마옵소서”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먹던 밥에 풋고추 저리김치 양념 넣고 단간장에 냉수 가득 떠서 모반에 받쳐 드리면서 “더운 진지 할 동안에 시장하신데 우선 요기하옵소서” 어사또 반겨하며 “밥아 너 본지 오래로구나” 여러가지를 한데다가 붓더니 숟가락 댈 것 없이 손으로 뒤져서 한편으로 몰아치더니 마파람에 게 눈 감추 듯 하는구나. 춘향모 하는 말이 “얼씨구 밥 빌어먹기는 공성이 났구나”
다음은 월매가 이도령을 위해 음식상을 차리는 대목이다.
‘끌끌 우는 생치 다리, 호도독 포도독 메초리탕, 꼬끼오 연계찜, 어전, 육전이며, 수란탕, 청포채에다 겨자, 고추, 생강, 마늘, 문어, 전복 봉을 오려 나는 듯이 괴어놓고, 전골을 들여라’
퇴기 월매의 딸 춘향과 남원 부사의 아들 이도령의 신분을 넘어선 사랑을 그려낸 춘향가는 판소리 다섯마당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그러나 월매가 이도령을 위해 영계찜, 어전, 육전, 신선로 등이 오른 화려한 밥상을 차려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판소리는 우리 전통음식의 보고라 할 만큼 사설(노랫말) 속에 다양한 음식이 등장한다. 춘향전에는 국물 있는 탕만 해도 네 종류(외초리탕·수란탕·장국·간장국), 나물은 무려 여섯 종류(청포채·녹두채·콩나물·고사라나물·미나리나물·슉운채)가 나온다.
월매 밥상은 산해진미로 가득할 뿐 아니라, 신선로 같은 궁중음식까지 올랐다. 중인 출신 월매가 어떻게 궁중음식을 차릴 수 있었을까? 또 춘향가 속에 등장하는 고추의 유입은 우리 밥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고, 변학도의 잔칫상에 오른 고기 요리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춘향가 속 비밀스러운 암호를 풀어본다.
판소리 ‘춘향전’에서는 "변학도의 명으로 춘향을 잡으러 온 사령에게 춘향의 모친인 월매가 감홍로를 계속 권하여 취하게" 하는 대목, 춘향이가 이몽룡과 이별할 때 향단에게 이별주로 "감홍로를 가져오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감홍로는 관서 감홍로라고도 불기기도 할 정도로 평안도지역 특히 평양을 대표하는 전통주이다. 감(甘)은 단맛을, 홍(紅)은 붉은색을, 로(露)는 증류할 때 소줏고리에 맺히는 이슬을 의미하는 것으로 감홍로의 특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감홍로는 그 유명세가 대단하여 별주부전과 춘향전 등에서 언급될 정도였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평양 감흥로(甘紅路)를 호남의 죽력고(竹瀝膏), 전주 이강고(梨薑膏)과 함께 조선의 3대 명주’로 꼽았다.
‘춘향전’의 “어사또 상을 보니 어찌 아니 통분하랴. 떨어진 개상판에 콩나물 깍대기 막걸리 한사발 놓았구나”는 구절에 깍두기가 등장하고 있다. 조선시대 조리서 중에서 깍두기의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부터이다. '깍두기'는 채소를 식재료로 다채롭게 사용하는 한국인 손맛의 백미. 소금에 무를 절인 음식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있어왔지만, 젓갈과 고춧가루에 버무려 김치로 사용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청실배’도 등장한다. 이도령이 춘향의 집을 찾아가 첫날 밤을 치르기 전에 월매가 내온 주안상 위에 ‘청실배’가 올려진다. 청실배(靑實梨)는 구한말에는 황실배(黃實梨), 청실배(靑實梨) 등의 이름으로 많이 재배되었으나 현재는 개량종 배나무에 밀려 대부분 사라진 실정이다. 정읍 두월리 청실배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97호 지정, 꽃이 피는 4월 말에는 온 마을이 환하게 보일정도로 아름다우며 소유자와 주민들이 정성으로 보호헤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나무는 마을주민들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현재까지 자람이 양호하고 나무의 수형도 아름다우며 열매가 굵고 맛이 좋아 재래종 과일나무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살찐 고기 하얀 회는 남원 요천의 은어요 가늘게 썬 진안에서 난 담배(鎭安草)라’ 가장 오래된 만화본 춘향가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현재까지 춘향의 이야기가 정확히 언제부터 판소리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1754년(영조 30년)에 유진한(柳振漢, 1712~1791)의 문집인 '만화집(晩華集)'에 실린 '가사 춘향가 2백구'라는 글에, 가객이 춘향의 이야기를 판소리로 부르는 것이 시로 읊어져 있다.
유진한은 천안시 병천면 만화출신으로, 호남지방을 유람하며 직접 듣고 본 판소리 춘향가(春香歌)를 한시로 옮겼다. 이를 '만화본춘향가(晩華本春香歌)'라고 한다. 원제목은 '가사춘향가이백구(歌詞春香歌二百句)'이다. 지역 특산물도 나온다. 살찐 고기 하얀 회는 요천(남원)의 은어이고, 귀한 과일 빨간 홍시는 연곡(구례)의 홍시라네. 또 실올처럼 가늘게 썬 진안에서 난 담배(鎭安草)를 관노에게 분부해 눌러 담아 올린다고 했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담배 중 최상품은 광주(廣州)에서 나는 금광초(金光草)와 전라도의 상관초(上官草)라고 하고, 진안에서 나는 담배는 상관 담배의 영향으로 재배하는 것이라 했다. 상관초는 완주군 상관면에서 나는 담배로 전주와 임실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만화집' 1권엔 '병중에 아들 력(瓅)이가 보내온 약물을 보고(病中見瓅兒藥物)' 엔 전북 완주의 솔잎주와 빙어회 등의 음식이 소개된다. '남방의 약물이 내 몸을 다 부지하니(南方藥餌摠扶吾) 가을 바람 불기 전에 어서 병을 낫고파라(不待秋風病欲蘇) 죽력(竹瀝)을 섞어 맑은 꿀 담은 그릇(竹瀝和來淸蜜器) 솔잎주를 다려낸 화로에다(松醪煎出練金爐) 정신을 번쩍 나게 해주는 빙어회와(精神發動氷魚膾) 맛이 서로 잘 어울린 석합(石蛤)으로 만든 요리(氣味相須石蛤需) 평지 길도 걷기 힘든 비쩍 마른 다리라서(瘦脚平途難步出) 부모 먹일 까마귀가 숲에 온 걸 누워 듣네(臥聞反哺在林烏)'
유진한의 아들 유력(柳瓅, 1741~1799)의 자는 맹명(孟明), 호는 용곡(龍谷)으로, 고산현(전북 완주군 고산면) 일대에서 살았다. 죽력은 푸른 대쪽을 불에 구워서 받은 진액으로, 성질이 차가워 열담(熱痰)과 번갈(煩渴)을 치료하는데 쓰는 약재다. 죽력은 푸른 대나무를 쪼개 항아리에 넣고 열을 가해 얻어진 대나무기름으로, 어혈을 풀어주고 원기회복에 탁월한 효능을 지니고 있다. 동학농민운동지도자 녹두장군전봉준이 일본군에 압송되어 만신창이가 됐을 당시 죽력고를 먹고 기운을 차렸다는 말이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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