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12월 18일 14시30분
[금요수필]한 해를 보내며
송일섭
시골에서는 섣달 그믐밤은 온 마을이 시끌벅적하였다. 날이 어두워지면 우리 동네는 물론 이웃 마을의 농악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들떠서 그냥 집에만 있을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꽹과리, 징, 장구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모이고 온 동네가 하나 된 농악놀이가 시작됐다. 어른들은 첫 번째로 동네의 큰 우물에 찾아가 광대의 현란한 몸짓에 따라 우물을 빙빙 돌았다. 우물 신에게 온갖 잡귀는 물러가고 새해에는 온 마을이 평화롭기를 기원한 것이다.
아이들은 농악놀이하는 모습을, 모닥불을 쬐며 재미있게 구경하였다. 농악대는 우물을 돌고 난 뒤 가까운 집부터 차례차례 꽹과리, 장구, 징, 북 등을 울리며 찾아다녔다. 농악대가 들어오면 집집이 큰 상에 음식을 내어놓았다. 농악대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음식을 먹었다. 특히 울안에 우물이 있는 집은 농악대들도 더욱 신명 나게 놀았다. 우물 신에게 다가오는 새해에는 집안 모든 식구가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비는 것이었다. 이것은 잡귀가 물러가도록 기원하는 풍습이었다. 한참 돌다가 차려놓은 음식을 먹었다. 어른들은 주로 막걸리를 먹었다. 어린이들에게는 떡을 주면서 마음껏 먹으라고 했다.
이제는 그때 풍장을 치던 어르신들이 하나, 둘 돌아가시고 조무래기로 따라다니던 내가 어른이 되었다. 그 좋은 풍습을 이어가지 못한 채 지금은 조용한 그믐밤을 보내고 있다. 세월 따라 그 이유야 많겠지만, 막상 농악놀이를 하려고 하니 장구며 꽹과리를 칠 줄 몰랐다. 그때야 깨달은 것은 어르신들의 농악 솜씨가 훌륭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어디에서 장구며 꽹과리를 배웠을까?
급속도로 발전하는 물질문명이 의식주는 물론 생활문화, 음식문화 심지어 놀이문화까지도 변화시키고 있다. AI 시대가 오고 자율주행이 일상화되는 편리한 과학 문명 속에서도 어찌 된 일인지 사는 것이 예전처럼 신명 나지 않는다. 집집이 돌아다니며 풍물굿을 치던 문화가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다. 편리한 것들이 세상에 가득하니 정겨운 것들이 어디론가 숨어버렸다. 이러면서 세상은 무섭게 변해가고 있다. 그럼, 5년 뒤쯤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나는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가? 어제랑 똑같이 살면서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사람은 매일 수많은 일을 겪는다. 그러면서 한해를 넘긴다. 내년에는 정겨운 것 한두 개쯤 마음 깊이 간직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해본다. ‘푸른 뱀의 해’야 잘 가거라. 어디선가 새벽 교회당 종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것 같다.
송일섭 수필가는
대한문학상 수상 등
수필집 첫날밤 등
전주양지노인복지관 문예창작강사 역임
현재 김제문인협회회장
지면 : 2025-12-19 10면
http://sjbnews.com/8675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