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12월 04일 14시14분
[온누리]정읍권번이 클래식을 만날 때
광주시립창극단 예술감독인 김용호 국악평론가가 해설을 맡아 한국적 클래식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짚어내며 공연의 의미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이 공연의 배경에는 정읍의 문화 근대유산인 ‘정읍권번’이 있다. 1928년 대부호 김평창과 그의 아들 김기남의 사재와 국악 사랑을 바탕으로 설립된 정읍권번은 소리·춤·가곡을 익히던 여성 예인들의 예술학교였다. 일제강점기의 어둠 속에서도 지역 예술을 지켜낸 이곳은 단순한 기생조합이 아니라, 근대적 예술교육의 중심지이자 지역 문화의 자존심이었다. 세월 속에 권번의 형식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남아 정읍의 문화적 뿌리로 이어져 왔다.
이번 공연은 바로 그 뿌리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피아노와 현악, 관악, 국악기가 어우러지고, 서양 클래식의 구조 속에 진도아리랑 주제에 의한 열정, 권번 풍류 주제의 여한, 권번 소리의 기초단가 ‘백팔가’ 등의 창작곡에 한민족의 정서가 스며들며 권번 예인들의 숨결이 되살아났다. 한 세기를 건너온 전통의 울림이 새로운 음악적 서사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 공연의 기획자이며 지휘를 맡은 정읍챔버오케스트라의 심정임 대표는 “전통은 박물관에 머물러서는 살아 있을 수 없다. 오늘의 무대에서 다시 숨 쉬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정읍권번의 문화적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탄생 시켜 정읍만의 독창적인 예술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이번 공연의 핵심 목적으로 이번 작업을 통해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 역량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말처럼 이날의 공연은 과거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읍권번의 예술혼을 K-클래식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번역해 미래를 향해 열어 보였다.
K-클래식의 세계화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전통에서 출발한다. 서양 음악의 틀에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는 순간, 음악은 국경을 넘어 보편적 감동으로 확장될 수 있다. 정읍에서 울려 퍼진 선율은 바로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정읍권번의 역사는 과거의 향수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공연은 지역의 전통자원과 그 기억을 오늘의 창작으로 되살려, 전통과 현대가 함께 움직이는 새로운 예술의 길을 제시했다. 정읍에서 시작된 이 작은 울림이 K-클래식이 세계로 나아가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
/오승옥(문화활동가·관광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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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12-05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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