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12월 03일 15시34분
시는 신의 눈짓을 받아 지어내는 존재의 집
박윤기 '음반 위의 소금쟁이'
1977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와 197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연거푸 당선되어 당시 큰 주목을 받았던 작가는 등단 50년 만에 첫 시집이다.
1970년대 숨 막히는 군사독재정권의 긴급조치 시절을 배경으로 하여 탄생된 신춘문예의 두 작품 '인종의 겨울'과 '도천수관음가'는 암울한 시대 속에 희망을 불어넣는 뜨거운 시들이었다. “쉬임없이 씨아를 돌리는 겨울, // 무구하게 내리는 목화송이를 / 물레에 휘감아 매면서 어머니는 / 연실처럼 아슬한 평생의 기억들을 / 실꾸리에 감고 계시네.”('인종忍從의 겨울') “우리가 한 송이 꽃이었을 때 / 우리를 스쳐가는 모든 것은 / 바람이었네. // 아직 꽃 피우지 못한 마을의 아이들은 / 눈이 먼 채 / 불감의 하늘 속으로 / 잃어버린 점자를 찾고 있었지.”('도천수관음가') 두 작품의 서두 부분들이다.
시인은 '인종의 겨울' 속 어머니가 눈 내리는 날 물레를 감는 심정으로, '도천수관음가'의 배경처럼 눈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비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으로 평생 시를 써온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한 편의 완성된 시를 만들기 위하여 절차탁마하는 과정을 끝없이 반복하는 시인이다. 시의 창조에서 그는 시어를 다듬고 또 다듬는 것을 일상의 일로 여기고 실천한다. 이번 시집을 편집하고 교정을 보는 과정에서도 시인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어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이고 고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완벽을 기하고자 하는 시인의 이런 성품이 시집 발간을 미루며 살아오는 데 일조했으리라고 여겨진다.
“소금쟁이 한 마리 / 발톱 세워 호수에 / 살포시 내려앉는다 // 파문이 퍼지며 / 뱅글뱅글 도는 / 호수 위 // 발톱이 긁고 가는 / 이랑의 골마다 / 파르르 떠는 청아한 울림 // 푸른 음반에서 / 통통 튀며 깨어나 / 맑고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 음향의 유리알들 // 한줄금 우레비로 / 등줄기 난타하며 / 후려치고 가는 짜릿한 전율”('음반 위의 소금쟁이'전문)
암울한 시대의 중압감을 소화해내고 마침내 물 위를 걷는 소금쟁이의 가벼움으로 삶의 재치와 활기를 보여주는 일련의 시편들에 이르기까지의 긴 과정이 이번 시집 '음반 위의 소금쟁이'라는 유리벽의 층층에 투명하게 누적되어 있다. 시집의 1부는 삶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도의 과정, 2부는 본래성을 향해가는 순리자연의 세계, 3부는 애환을 품고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의 현장, 4부는 순수 감각을 통해 다가가는 순수미학의 세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집의 평설을 통해 김광원 문학평론가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시인이 간구하는 것은 결국 진선미의 세계이며, 이 진선미의 세계를 추구하는 시 창작이라는 작업은 곧 구도의 과정이면서 대동 세계를 꿈꾸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아울러 현실의 고통을 버티게 하는 초월적 신성은 외부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내부에서 찾아지는 것이며, 시인은 직관을 통해서 끝없이 신(초월적 신성)과의 대화를 나누고, 이런 과정 속에서 사랑과 자비의 시가 창조되는 것임을 말한다. 존재 자체로 삶의 활기가 가득 채워지는 꿈의 세계는 시인이 추구하는 궁극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생각과 감성을 오롯이 담아낸 완벽한 시는 없다. 마지막까지 고치고 다듬어 갈 뿐이다. 선후배들의 절편의 작품집을 받고도 책빚을 갚지 못하고 미적거리다가, 미진한 시를 엮어 첫 시집을 내놓는다. 부끄럽다"고 했다.
시인은 전주출신으로 전주북중, 신흥고, 원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익산 이일여고, 전주 상산고 교사를 지냇다. 현재 시동인회 '포엠만경'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이종근기자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지면 : 2025-12-05 10면
http://sjbnews.com/866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