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12월 03일 14시54분
[금요수필]굽은 가지의 미학
뒤엉킨 화단을 바라보며 내 마음도 그처럼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미루어둔 정리를 시작하기로 했다. 화단의 꽃과 나무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멋대로 번지고 뒤엉켰다. 이번엔 다 걷어내고 대신 소나무 한 그루를 들이기로 했다.
우리 집 화단은 소나무가 좋아하는 넓은 공간과 햇빛, 바람결을 갖추지 못했지만, 나는 그에게 자리를 내주듯 공간을 넓히고 흙을 채웠다. 땅이 조금 넓어졌을 뿐인데 마음도 함께 넓어진 것 같았다.
며칠 뒤 소나무가 도착했다. 세월이 비틀어놓은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적송이었다. 천연기념물 제290호 자목(子木)이라고 했다. 가지는 곧지 않았지만, 용틀임하듯 굽은 선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 굽음은 버틴 세월의 증거처럼 보였고 내 삶의 어떤 자리와 닮았었다. 삶도 그렇게 비틀리며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날 이후 화단의 기운이 달라졌다.
좁았던 공간이 넓은 정원처럼 느껴지고, 흙냄새가 은근히 올라왔다. 소나무를 중심으로 햇살은 잎끝에서 반짝였고, 그늘은 단정하게 드리워졌다. 바람이 굽은 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며 솔향을 흩뿌렸다. 화려한 꽃 대신 푸른 침엽이 자리를 지키자, 공간 전체가 차분하고 묵직해졌다. 나무 한 그루가 집안의 표정까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릴 적엔 소나무가 흔한 나무라 여겼다. 사계절 내내 푸르다고, 어느 산에나 있다고, 특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을 지나며 알게 되었다. 사철의 비와 바람, 뜨거운 볕과 차가운 눈을 온전히 견디며 잎 빛을 잃지 않는다는 것, 그 자체가 말 없는 삶의 언어라는 것을.
소나무는 햇빛을 향해 자신을 비틀고, 바람을 피하듯 가지를 눕힌다. 그 굽음은 억지가 아니라 순응이다. 굽어서 하늘을 품고, 비틀려 땅에 닿는 모습은 세상살이의 태도와 닮았다. 누구나 곧게 살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든 휘게 만든다. 그 굽음 속에서 우리는 견디는 법을 배우고, 다시 일어서는 힘을 얻는다.
소나무의 껍질은 거칠고 따뜻하다. 세월의 켜가 쌓여 갈라진 틈마다 송진이 맺혀 호박빛으로 반짝인다. 상처가 많다는 것은 오래 견뎠다는 증거일 것이다. 굽은 가지와 갈라진 껍질이야말로 나무가 지나온 시간을 말해주는 언어다.
비 오는 날이면 잎사귀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묘한 위안을 준다.
세상이 흔들려도 나무는 제 자리를 지킨다. 휘청이되 꺾이지 않고, 굽을지언정 다시 푸르게 선다.
아침마다 창을 열면 굽은 가지 사이로 하늘이 걸려 있고, 햇살이 솔잎을 비추며 미세한 빛의 결을 만든다. 그 빛을 보며 속으로 말한다.
"곧지 않아도 괜찮다고. 삶이 굴곡투성이라도 푸름만 잃지 않는다면 그것이면 된다고”
소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곧음보다 굽음을, 속도보다 단단함을, 화려함보다 품격을.
삶은 완벽한 직선이 아니다. 굽은 선이기에 품을 수 있는 하늘이 있다. 굽은 가지가 들려주는 미학은 언제나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오늘도 소나무 가지 아래에서 삶의 모양을 다시 배운다.
윤철 수필가는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역임
(현) 전북특별자치도문인협회 부회장
수상 : 전북수필문학상, 새전북신문문학상, 리더스에세이문학상 등 다수
수필집 : '칸트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 가족은 안녕한가요', '나를 닮은 타인 그 이름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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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12-05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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