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박은희 - 2025년 11월 27일 15시06분
밤 줍고 추어탕 끓여 먹기 ‘추억의 소환’
어농삼락 ⑧친척 어른들과의 여행아버지 9남매 모임 50년간 이어진 가족 행사
이모·외삼촌 부부와는 양양서 파크골프 ‘굿 샷’
백거이 시 ‘ 술잔을 들며’는 은퇴자를 위한 조언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부싯돌 불꽃처럼 짧은 인생/풍족한 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자/하하 웃지 않으면 그대는 바보’
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쟁하사) 石火光中寄此身(석화광중기차신)
隨富隨貧且歡樂(수부수빈차환락) 不開口笑是癡人(불개구소시치인)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가 쓴 한시(漢詩) ‘술잔을 들며’(對酒)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서재에 걸어두고 즐겨 읊었다는 이 시를 나는 몇 년 전 귀농인 유튜브를 통해 처음 알았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지인들과 함께 시골에서 영농법인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그는 사람들이 왜 귀농을 했는지 물을 때마다 이 시로 대답을 한다고 말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런 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이른 감이 있지만 인생을 한 발 떨어져서 호방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의지와 자세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드는 요즈음, 삼락원에는 할 일이 별로 없다. 비록 ‘’날림 농사‘일망정 한여름 잡초와 벌이던 지긋지긋한 전쟁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평화롭고 적막하다. 막상 할 일이 없다보니 안양에 머물러 있거나 여행을 자주 떠난다. 10월 들어서 친척 어른들과 함께 1박 2일 여행을 두 차례 다녀왔다. 여행은 가족이나 친구와 다니는 게 가장 편하고 즐겁긴 하지만 연로한 어른들과의 여행은 ‘찰라의 인생’에서 행복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했다.
아버지는 9남매(3남 6녀)의 둘째고, 어머니는 7남매(3남 4녀) 중 셋째다. 친가 쪽으로는 작은아버지 한 분을 제외하고 모두 생존해 있고, 외가 쪽에서는 어머니를 포함해 두 분이 작고했다. 큰아버지가 올해 89세로 최고령이고, 막내고모가 67세로 최연소이다. 이 분들은 크고 작은 질환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대부분 건강한 편이다.
올해 봄 별장에 모인 친가 쪽 어른들이 주변에서 캐온 미나리를 다듬고 있다.
친가 쪽 어른들은 남매계를 만들어 지금도 1년에 한 두 번 정도는 모인다. 내가 초등학교시절부터 시작했으니 50년 이상 이어진 가족 행사다. 지난 10월 둘째 주에도 모임을 가졌다. 부부 참석이 원칙이고 가끔씩 자식들까지 함께 하면 참석자는 20여명이 넘는 경우도 있다. 나이 차이가 20년이 넘지만 만나기만 하면 무슨 할 얘기가 많은지 밤늦도록 왁자지껄하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어른들은 초기에는 매번 집을 돌아가면서 음식을 준비했지만 5년 전부터는 충북 옥천에 있는 사촌의 별장을 이용한다. 여기서는 봄엔 나물을 캐고 가을에는 밤을 주우며, 연못에 풀어놓은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여먹는 등 옛 추억을 소환한다. 거실에는 노래방 기기까지 갖춰놓아 밤새 주변 눈치 보지 않고 목 놓아 노래를 부를 수도 있으니 어른들로서는 최고의 놀이터다.
따라서 어른들은 이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 넷째 고모부(82)는 3년 전 치매 판정을 받았지만 이 자리만큼은 반드시 참석한다. 고모가 혼자 가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대화와 식사를 거부한 채 종일 풀이 죽어 있다가도 함께 간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어른들이 매번 이번이 마지막 모임일 거라고 하면서도 그게 3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 분 두 분씩 세상을 떠나도 오랫동안 계속될 것 같다.
나의 역할은 전주에 거주하는 분들을 태우고 가거나 행사가 끝나면 전주로 모시고 가는 것이지만 나 또한 이 모임이 아주 유쾌하고 재미있다. 고모들이 하이톤의 목소리로 밤새 떠들며 노는 분위기가 정겹고 좋다. 오래 전 진안 외사양마을에서 살 때 있었던 일들을 소재로 주고받는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9남매에다가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도우미까지 10여명이 매일 부대끼며 살았으니 하루하루가 쉽사리 지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이야깃거리가 오죽 많을까?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새벽이 되면 밖으로 나가 주변에 널린 쑥과 미나리를 캐거나 두릅을 따고, 연못에 통발을 설치해 미꾸라지를 잡는다.
이번 10월 모임때에는 처음으로 인근 야산에 있는 알밤을 실컷 주웠다. 밤이 얼마나 많은지 마치 공중에서 일부러 살포해놓은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자루에 담기만 하면 될 정도였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밤을 한꺼번에 주워본 적이 없다. 주변에 인가도 별로 없는 데다 굳이 찾아오는 사람도 없기에 가능한 것이다. 1시간 남짓 동안 각자 거의 한 말씩은 주운 것 같다. 이곳 알밤은 농약은 물론 퇴비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자란 자연산이라서 그런지 맛이 아주 좋다. 그렇게 1박 2일을 지내고 나면 모든 분들의 얼굴이 밝아진다. 나 또한 심신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11월 강원도 양양 남대천 둔치에 있는 양양송이조각공원 파크골프장에서 외가 쪽 어른들이 골프를 치고 있다.
양양 인근에 있는 기사문항에서는 아침마다 경매가 열린다. 요즘엔 주로 대구와 대왕문어, 도루묵 등이 잘 잡힌다.
친가 쪽과는 달리 외가 쪽에서는 그런 모임이 없어서 아쉽다. 그래서 11월 중순에는 내가 주도하여 서울에 있는 이모 내외와 함께 강원도 양양에 사는 막내 외삼촌을 찾아갔다. 25년 전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강원도 여행을 다녀온 후 처음이다. 이번에는 일대 여행을 하는 대신에 ‘파크골프’를 쳤다. 파크골프는 골프와 룰이 같지만 골프채 헤드가 큼지막하고 공도 커서 치기가 쉽다. 비용도 일반 골프의 10분의 1 밖에 들지 않는다. 요즘 은퇴자들을 중심으로 파크골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이유다.
우리가 찾은 양양송이조각공원 파크골프장은 양양군이 양양읍 송암리 남대천 둔치 1만5,000평에 조성한 5코스 45홀 규모로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멋진 곳이다. 홀 거리는 50~150m에 이르러 제법 휘두르는 맛이 좋다. 이 골프장은 남대천의 넓은 갈대밭이 펼쳐져 있고 멀리 점봉산과 설악산까지 보인다. 근래에는 파크골프 명소로 소문이 나면서 서울에서도 전세버스를 타고 와서 즐기는 사람들도 꽤 있을 정도다.
올해 69세인 막내 외삼촌은 아직도 현역처럼 활동을 하고 있다. 호텔리어로 일하다가 1년 전 은퇴한 외삼촌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딴 후 지금은 어르신들 말벗 봉사와 함께 파크골프로 보내고 있다. 참 여유롭고 멋진 은퇴 생활이다.
이번에 어른들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은퇴후 건강을 유지할 때까지가 인생의 황금기라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달팽이 뿔’ 위에서 많은 걸 다퉈왔다. 오로지 공부와 성적, 일류 대학 입학과 취업, 승진과 출세를 위해 달려오고 한편으론 자식들을 위한 투자에 모든 걸 걸었다. 이런 흐름에서 겨우 벗어날 만하면 늙고 힘이 빠져서 결국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인생을 통틀어 시간적 여유와 함께 건강이 뒷받침할 수 있는 시기는 정년 이후부터 겨우 10여년에 불과하다는 말씀이다.
이젠 새롭게 거창한 일을 시작하거나 사업을 벌일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지금까지 모아놓은 자산과 받게 될 연금이 많건 적건 간에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게 어른들의 한결같은 말씀이다.
백거이의 자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술을 좋아하고 낙천적으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백거이의 시는 통속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당나라에서 사대부(士大夫) 계층뿐 아니라 기녀(妓女), 목동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애송할 정도로 유명했다. 그 안에 인생을 즐기고 행복을 찾아가는 통찰력과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술잔을 들며’는 자칫하면 주어진 현실에 안주한 채 발전을 위해 노력을 하지 않는 삶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은퇴이후의 삶에서는 가장 훌륭한 조언이 아닐까 한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는 이 시를 읊으며 건배사를 하고 싶다.
“달팽이 뿔 위에서~ 웃으며 살자~”
최진환(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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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11-28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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