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11월 24일 08시03분
불완전한 삶의 윤리학
[책 마주보기] 비탈리 카스넬슨의 '죽음은 통제할 수 없지만 인생은 설계할 수 있다'(서운정)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 통제란 환상에 가깝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예측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삶을 경직시키고 불안을 증폭시킨다. 반면 조율은 흔들림을 전제로 한다. 피아니스트가 매 연주 전마다 음을 맞추듯, 인간도 하루하루 자신의 마음을 맞춰야 한다. 온도와 습도, 공간의 울림이 변하면 소리의 결도 달라진다. 저자가 제시하는 삶의 윤리란 바로 이 변화의 감각에 귀 기울이는 능력이다. 통제 대신 조율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안정함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일이다.
스토아 철학의 핵심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통제할 수 없는 것에는 평정하게 머물라”이다. 저자는 이 오래된 문장을 오늘의 삶 속에서 되살린다. 평정은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세계의 리듬을 구분할 줄 아는 분별의 감각이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애쓰는 대신, 내가 조율할 수 있는 영역 나의 태도, 반응, 시선을 다듬어 가는 것. 그 작은 조율이 삶 전체의 조형을 결정한다. 인간은 세계를 지배할 수 없지만, 세계에 대한 반응의 방식을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말한 ‘지연(différance)’의 개념처럼, 삶은 결코 완성에 이르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도착하지 못한 채, 진행 중의 존재로 살아간다. 삶의 설계란 이 지연의 시간을 견디는 일,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불안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의 미학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러니까 조율의 삶은 ‘결과’보다 ‘진행’을 중시한다. 거기에는 정답도, 완벽한 해석도 없다. 오직 불완전함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다시 그려 나가는 과정만이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설계론은 개인의 성공학이 아니라 관계의 윤리학으로 확장된다.
음악이 서로 다른 악기의 소리를 들으며 화음을 이루듯, 우리의 삶 또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조율된다. 레비나스가 말한 것처럼, 윤리란 타자와의 접촉에서 시작된다. 타자는 나의 계획을 어지럽히고, 나의 질서를 흔든다. 그러나 그 흔들림 속에서 인간은 더 깊은 자신을 발견한다. 완벽한 설계는 윤리적으로 닫힌 세계다. 반면 불완전한 설계는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린 구조다.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수정해 나간다. 그것이 윤리의 본질이며, 불완전성의 완전이며 조율의 윤리다.
죽음 이후에도 남는 것은 업적이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맺었던 조율의 흔적이다. 타인의 마음에 남은 온기, 한 문장에 남은 사유의 결, 실패 속에서도 자신을 다듬었던 시간들이야말로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가장 깊은 유산이다. 저자는 이를 ‘영혼의 설계도’라 부른다. 완벽하게 그려진 청사진이 아니라, 지워지고 덧그려진 흔적이 많은 낡은 도면이다. 거기엔 후회도, 망설임도, 사랑의 흔적도 함께 새겨져 있다. 그것이야말로 불완전한 인간이 남기는 가장 아름다운 기록이다.
서운정 작가는
군산 출신으로, 제18회 ‘바다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솔바람소리문학회 회원으로 활동중이다.
지면 : 2025-11-25 10면
http://sjbnews.com/865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