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11월 16일 14시04분
달팽이처럼 살다간 김상준 선생을 기억해야
이종근 문화교육부장
신국판 양장, 552쪽으로 펴낸 이 책은 1947년에 발간한 시문집이다.
그의 호는 '농와(農蝸)'다. 농사를 지으면서 달팽이처럼 살겠다는 의미이다. 달팽이는 투기하거나 잔꾀를 부리지 않고 언제나 자기 집을 짊어지고 다니는 고지식함, 집념, 지족(知足)의 삶을 연상케 한다.
“옛날 사람은 달팽이를 ‘와우(蝸牛)’라고 했다. ‘와’는 달팽이, ‘우’는 소라는 뜻으로 역시 행동이 소처럼 느릿하고 굼뜨다는 의미다. '우보호시(牛步虎視)', 뚜벅뚜벅 느린 소걸음을 걸어도 눈은 범처럼 형형히 빛나야 한다는 말을 되새기며 달팽이를 닮아 보라”
삶은 달팽이처럼 천천히, 그러나 쉼없이 살아가는 것. 바로 이같은 발자취가 그의 시 행간행간마다 숨겨져 있다. 달팽이처럼 외로우면서도 우직하게 험난한 길을 헤쳐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셈이다.
'농월(弄月)'은 달과 함께 풍류를 즐기기 좋은 장소 중 하나이다. 농월은 달을 실없이 놀리거나 멋대로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달과 능숙하게 교감하면서 그와 일체되는 낙을 즐기는 경지를 말한다. 달 밝은 밤이면 작가는 누정에서 맑은 바람과 찬 이슬에 취해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학자(學者)는 스스로 학문과 재주가 부족하다고 여겨 자기수양을 하면서 가볍게 나서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은자(隱者)는 지나치게 고결해 세상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세상과 절연한 사람이다. 수 많은 유학자와 선비가 조식의 시대에 있었지만, 그만큼 실용적인 교육을 실시한 사람도, 다가올 위기를 예측해 환란을 극복할 인물을 육성한 사람도 없었다.
나아가면 목숨을 걸고 세상을 위해 일하고, 물러나거나 나아가지 않았을 때는 자신을 갈고 닦으며 세상에 쓰일 재목을 준비하는 선비의 길을 작가는 보여줬다. 그는 관직에 몸담지 않고 현실의 불의와 부정을 비판한 '처사(處士)'로 수 많은 제자를 키우며 국가 위기에 대비했다. 그의 묘비에 '농와처사김공상준지묘(農蝸處士金公相晙之墓)'란 글귀가 선명하다.
천천히 가면 어때 꼴찌라도 괜찮아 지금처럼 꾸준히 할 수 있어. 단지 오래 걸릴 뿐 그냥 조금 느릴 뿐 언젠간 해낼 거야 절대 포기 안해. 지치고 힘이 들 땐 잠시 쉬어 가면 돼 조급히 생각 안 해 할 수 있어. 내 스스로 해내면 더욱 뿌듯할 거야 조금 오래 걸려도 절대 포기 안해. 할 수 있어 내 힘으로 할 수 있어 포기 않고 할 수 있어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어, 스스로 할 수 있어.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느린 풍향계를 달고 나는 나를 운반한다. 내일의 바람은 아직 내 것이 아니므로 후생(後生)에게 맡기고, 꽁무니에 따라 붙는 오늘의 바람을 폐부 깊이 들이마신 채, 나는 나를 끌고 평생을 간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풍향계를 달고
나는 나를 운반한다. 현생(現生)에 부는 바람만이 오직 내 편이다. 너무 느려 가고 있는지, 멈춰 서 있는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내 눈에는….
그러나 뒤에 그어진 금을 볼 때 그는 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달팽이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무척이나 열심히 그 길을 갔다. 그러나 꿈을 이루기는커녕, 하마터면 밟혀 죽을 뻔했다. 그러면서도 주검 앞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이런 것을 어떤 공식이나 지식이나 진리로 설명해야 할까? 꿈은 아름답다는데. 사람은 꿈을 먹고 산다는데. 내가 꾸는 꿈이 달팽이가 꾸는 꿈은 아닐까.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정처 없이 떠난 존재의 여정은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지나온 길 흔적처럼 남아 덧쌓인 사연은 저대로 떠나보내고 세월의 풍파에 흔들리며 흔들리며 흘러가리.
14일 고창 르네상스웨딩홀에서 출판기념식과 함께 농와장 장학금 수여식이 열렸다. 이는 농와장 인재육성장학재단에서 고창군 지역의 학생들을 위해 지급하는 장학금이다.
이 장학금은 고창군에 거주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며, 성적우수자 또는 이사장 추천 등으로 선발된다. 2021년 설립된 재단은 고창군과 협약을 맺고 매년 고창인재 육성을 위해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 책은 때로는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두렵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흔들리더라도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속도로 걸어가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인생길 위에서 기다림 속에 희망을 찾고, 흔들리는 순간마다 자신을 다독이며 나아가는 삶의 태도를 일깨운다.
'삶은 속도가 아닌, 방향성이다'(Life is a matter of direction, not speed) 전북 사람이라면 마땅히 달팽이처럼 살다간 김상준 선생을 기억해야 한다.
지면 : 2025-11-17 7면
http://sjbnews.com/8646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