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10월 23일 15시20분
[전북의 창]일조권과 조망권에 대한 생각
사회적 합의는 쉬운 말에서 시작된다. 도면과 수치만으로는 삶의 장면이 보이지 않는다. 주민·설계자·행정이 같은 그림을 보고 같은 말을 쓰도록 생활 언어로 바꾼 자료가 필요하다. “스카이뷰 코리더”는 “하늘 조망길”로, “일조사선”은 “겨울 오전의 최소 햇빛선”으로 풀어 설명한다. 어느 골목에서 어떤 산줄기가 보여야 하는지, 어느 시간대에 빛과 바람이 드나들어야 하는지 장면으로 공유한다. 회의도 찬반 표 대결이 아니라 대안 비교로 바꾼다. “좋다/나쁘다” 대신 그늘 시간, 계절별 일사량, 보행공간, 공개공지 면적처럼 보이는 숫자로 주고받는다. 숫자는 감정을 없애지 못하지만 책임과 효과를 확인하게 한다. 동시에 어린이·노년 패널, 상인·통학로 이용자 등 다양한 목소리를 초대해 일상의 시간표와 시선 높이를 교환한다. 이렇게 말이 통하면 합의의 문이 열린다.
합의의 핵심 중 하나는 문화경관의 보전이다. 문화경관은 누적된 역사와 자연이 겹쳐 만든 기억의 지형이다. 구도심의 골목,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 하천과 능선을 따라 열린 시각축은 도시의 정체성을 이룬다. 높이와 형태를 ‘허용/불허’만으로 재단하지 말고, 그 장소를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과 동선을 기준에 올려야 한다. 하늘조망길을 약속처럼 남기고, 문화유산을 향한 시선은 막지 않으며, 바람길과 햇빛길은 설계 초기에 확보한다. 가까운 이익만 크게 보고 먼 이웃의 손실을 작게 보는 근접성 편향을 줄이기 위해, 인근·원거리 이해관계자가 함께 참여하는 숙의 구조를 만든다. 결정 과정과 결과 지표는 ‘도시 일조·조망 일기’로 기록·공개해 다음 사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문화경관은 일회성 경치가 아니라 세대가 공유하는 자산이므로, 보전과 이용의 균형을 장기 과제로 삼아야 한다.
헌법 제35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제23조 제2항은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함을, 제9조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을 국가의 의무로 선언한다. 또한 제122조는 국토의 효율적 이용과 균형 발전을 위한 제도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 이 규정들은 일조·조망과 문화경관을 개인의 권리이자 공공의 책무로 함께 다루라는 방향을 제시한다. 해법은 규정을 더하는 일이 아니라 시민성을 키우는 일이다. 첫째, 정보를 삶의 언어로 바꾸어 모두가 이해한다. 둘째, 대안을 병렬로 놓고 보이는 숫자로 공정하게 주고받는다. 셋째, 약속을 지키는 환원을 일상화해 신뢰를 쌓는다. 넷째, 문화경관을 도시의 장기 자산으로 선언하고 세대 간 계약으로 관리한다. 이렇게 하면 환경권과 재산권, 건축·경관 제도는 ‘정답을 고지하는 법전’이 아니라 ‘학습하는 공동체의 도구’가 된다.
나와 가까운 우리만의 유리함을 계산하면 도시 전체의 일조·조망, 그리고 문화경관의 품질은 떨어진다. 반대로 서로의 일상과 기억을 존중하는 대화, 삶에 닿는 정보, 타협을 가능케 하는 설계 선택지, 신뢰를 축적하는 환원이 만날 때 개인의 생활이익과 공동의 경관자산은 함께 좋아진다. 고밀 도시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길은 더 높은 건물이 아니라 더 높은 합의의 수준이다. 다음 세대에게 남겨야 할 것은 층수가 아니라, 빛과 하늘, 물과 산이 겹쳐 이룬 문화경관의 맥락이다./노기환(온문화유산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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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10-24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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