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7월 06일 15시10분
[온누리]서예가 몽연 김진민
서예도 변화가 있었다. 안진경이나 구양순, 왕희지를 넘어 우리만의 필법을 찾으려 했다. 동국진체(東國眞體)이다. 이를 주장한 사람은 17세기 서예가 이서(李漵)였다. 조선의 진짜 글씨를 써보자고 한 것이다. 해남의 윤두서와 이광사를 거쳐 동국진체는 전라도에 뿌리를 내렸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에 의해 완성된다.
전주의 이삼만은 스승 없이 오로지 이광사의 글씨를 보고 독학했다고 한다. 집이 가난하여 종이를 구할 수 없자, 삼베에 연습한 후 빨아서 다시 쓰거나 바위를 이용했다. 돌벼루 3개를 구멍 낼 정도로 서예에 매진한 그는 죽을 때까지 붓을 놓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덕에 서울이 아닌 전북이 서예의 중심이 되었다.
전북대 김병기 교수의 말대로 한말의 이정직, 조주승, 박규환 등을 거쳐 광복 후 황욱과 송성용으로 맥이 이어지며 전북은 한국 서예를 주도한다. 당연히 빼어난 서예가들이 줄을 이었다. 그 많은 서예가 중에 몽연(夢蓮) 김진민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른 나이에 활동을 접은 탓도 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한 것이다.
김진민은 1912년 정읍 태인의 천석꾼 김수곤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넉넉했던 살림에 아버지는 호남과 충청의 불사를 맡아 할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육당 최남선과 이당 김은호, 성당 김돈희 등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중 김돈희는 당시 서단의 최고 실력자였다.
아버지는 딸이 아홉 살 되던 해 집안에 서당을 차려 한학을 시키는가 하면 김돈희를 집으로 불러 서예를 가르쳤다. 김돈희 역시 서울에서 정읍까지 기꺼이 오갔다. 열한 살 때 김진민은 영광 불갑사 현판과 장성 백양사 우화루 현판을 쓴다. 지금도 걸려 있는 글씨를 보면 어린 소녀의 작품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이 넘친다.
12세이던 1924년 최고 예술의 등용문인 조선미술전람회 서예 부문에 입선해 파란을 일으켰다. 여성 최초이자, 사상 최연소 입상자였다. 1931년 조선미전 서예 부문이 폐지될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출품해 입선 8회, 특선 5회의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16세 때인 1928년에는 심사위원 만장일치 무감사입선을 하기도 했다.
조선미전에 서예가 폐지되고, 또 18세에 당시 경동고 체육교사이던 이진형과 결혼하면서 가사와 양육에 주력하며 활동을 접었다. 아들 이성기씨의 증언에 의하면 집에서 주로 사경(寫經)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이 별로 없다. 대표작으로는 21세에 쓴 금산사 미륵전의 ‘대자보전(大慈寶殿)’과 월남전에서 전사한 아들을 기리기 위한 국립현충원 ‘능인보전(能仁寶殿)’ 현판, 그리고 낙지론(樂志論) 8곡 병풍 등이다.
서예계의 전설로 주목받았던 김진민은 여성이라는 차별과 가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관습 속에 잊혀진 서예가가 되었다. 지금이라도 그녀의 업적을 기리고, 숨어있을 작품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서예를 넘어, 우리 문화사를 풍요롭게 하는 길일 것이다.
/김판용(시인‧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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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7-07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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