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박은희 - 2025년 06월 25일 14시32분
[생의 한가운데]한국의 제천의례와 천손사상 -배타를 넘어 포용으로-
한국의 제천의례는 단군신화를 그 뿌리로 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며, 하늘의 뜻을 땅에 실현하고자 했다는 서사는 한민족의 역사적 자각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시대와 왕조에 따라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백제의 교천(郊天),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의 팔관회(八關會) 등 다른 이름과 형식으로 이어졌지만,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참여하는 국가적 제의라는 점에서 공통된 정신을 지닌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 유교적 정치질서가 확립되면서 ‘천자만이 하늘에 제를 올릴 수 있다’는 중국 중심의 사상이 영향을 미쳤다. 세종은 조선을 제후국으로 자처하며 “제후가 하늘에 제사함이 옳지 않다”는 입장을 내세웠고, 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국가적 제천의례를 중단하고 하늘에 대한 제의 권한을 유보하였다. 이후 고종이 1897년 원구단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제천문화의 부활을 시도했으나, 일제의 압력과 식민통치로 인해 국가적 제천의례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제천의례는 민중 속에서 살아남았다. 국가 주도의 제례가 사라진 뒤, 민족종교들은 제천의례를 민중적 자산으로 복원하고 재창조했다. 대종교의 선의식, 보천교의 고천제, 원불교의 법인기도 등은 모두 하늘신앙을 민족정신과 연결하며,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의 고난 속에서 자존과 독립을 상징하는 의례로 기능했다. 이러한 제천의례는 왕이나 국가 권력의 전유물이 아닌, 민중 공동체의 주체적 신앙 행위로 전환되었으며, 그 사상적 핵심에는 바로 ‘천손사상(天孫思想)’이 자리하고 있다.
한국인의 천손사상은 유대인의 선민사상이나 일본인의 천황중심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유대인의 선민사상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야훼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배타적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인의 천황주의는 ‘천황은 신의 자손’이라는 논리로 천황의 통치를 신격화하고, 제국주의 침략의 정당화를 이끌어냈다. 이들 사상은 공통적으로 자기 민족만의 우월성과 신성함을 절대화하고, 타민족에 대한 배제와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어 왔다.
이와 달리,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나타난 단군신화는 ‘하늘의 자손’으로서의 존엄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특정 민족의 우월성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모든 인류가 단군의 자손으로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존엄한 존재로 확대해석할 수 있다. 대종교의 『신사기』에는 인간의 기원을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라는 한 사나이와 한 여인이 짝을 이뤄 그 자손이 나뉘어 황인종ㆍ백인종ㆍ흑인종ㆍ홍인종ㆍ남색 인종 등 다섯 빛깔의 종족이 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이는 천손사상이 인류 보편적 평등과 형제애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동학의 외침에서도 잘 드러난다. 동학은 신분제 사회에서 억압받는 민중들이 곧 하늘의 자손이라는 존엄한 정체성을 부여함으로써 평등과 개벽의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인류는 민족, 종교, 인종의 차이를 내세운 혐오와 전쟁, 갈등 속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시대에 한국의 천손사상은 단지 전통적 신념체계를 넘어서, 인권과 평등, 공존의 철학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모든 인간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사상은, 인류 문명이 경쟁과 지배를 넘어 평화와 공존으로 나아가기 위한 정신적 기반이 될 수 있다. 하늘에 대한 경외를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조화를 회복하고자 한 한국의 제천의례와 천손사상은 오늘날 세계에 던지는 소중한 평화의 메시지이다./박광수(원광대학교 명예교수, K-전통문화학술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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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6-26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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