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읍성의 역사와 문화를 잇다
황재남 사진가 지난해에 이어 10일 무장읍성서 무장읍성 사진전
황재남 사진가가 10일 고창 무장읍성 일원서 축성 608주년 제5회 무장읍성축제 사진전을 갖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바라며 꾸려진 이 자리는 동문 옹성, 진무루 옹성 야경, 사두봉, 야경에 물든 동벽 등 무장읍성의 사계절을 잘 담았다.
사적 제346호로 지정된 무장읍성은 조선시대 호남 방어의 요충지로, 관과 민이 힘을 합쳐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호국의 상징적 유산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초로 무혈 입성한 역사적 장소로도 의미가 깊다.
작가는 지난해엔 무장읍성 최초의 사진전을 개최, 계단 양 옆의 축대 돌에도 연꽃과 꽃병에 꽃 등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습을 담았다.
이번해엔 지난해보다 더 꼼꼼하게, 섬세하게 무장읍성을 소개한다.
무장읍성은 고려시대까지 무송과 장사의 두 고을이었던 것을 효과적인 왜구의 방비를 위해 1417년에 합해 두 고을의 첫 자를 떼어 ‘무장’이라고 했다. 전라도 여러 고을의 장정과 승려가 동원돼 성벽을 쌓고 성 위에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만들고 옹성을 갖춘 남문과 동. 북문을 세웠다.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 무장진을 삼을 때 두 고을 중간 지점인 이곳을 읍치의 중심지로 삼고 성을 쌓았다. 객사 처마에는 ‘송사지관(松沙之館)’이라고 쓰인 대형 편액이 내걸려 있는 까닭이다.
이는 옛 무장현의 위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선조 14년(1581년)에 지었다고 하니 400년이 넘었다. 객사 한 가운데 정청은 임금의 궐패를 모셔놓고 관헌들이 매월 초하루, 보름 북쪽 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리던 신성한 공간이다. 좌우 건물의 지붕이 본관보다 낮은데 그 이유는 격을 낮추기 위함이다. 그래서 객사 사진도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객사 뒤쪽으로 돌아가면 건물과는 떨어져 위치한 굴뚝도 볼 수 있고, 이로 오르는 계단에는 눈에 띄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부조가 있더. 무엇보다 섬세하게 표현된 꽃 화병이 인상적이었다.돌계단에는 구름무늬, 태극무늬 꽃무늬 등이 새겨져 눈길을 끈다.
읍성 안에 판 우물 두 곳 또한 풍수지리학적으로 뱀의 눈에 해당하는 지점에 있다.
객사 오른쪽에는 수령이나 군수들의 공덕비와 영세불망비 등이 줄지어 서 있다. 모두 34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11기만 남아 있다.
이 가운데 쇠를 녹여 만든 철비와 귀부 용두를 삐딱하게 조각한 비석이 이채롭다. 철비는 참판을 지낸 이 고을 출신 김영곤(金永坤)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삐딱한 모양의 비석은 정권 영세불망비이다. 아전의 텃새가 얼마나 드셌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여느 비석처럼 평범한 것 같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비석을 받치는 거북이의 모습이 매우 다채롭게 되어 있다. 언젠가 공덕비를 세우라고 재촉했을 원님에게 ‘아나 공덕’하고 비웃는 모습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 마음에 안들면 이곳의 원님은 왕따였고,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바로 이같은 기질이 있었으니 현감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울 때도 아전들이 감히 ‘야, 틀어버려라’ 할 수 있었다.
‘사두봉과 용소’는 사두봉을 깎아 우뚝한 뱀의 머리를 수그리게 해 마을의 우환을 예고, 사두봉에 느티나무를 심고 개구리 연못을 만들어 무장 고을을 다시 번영하게 했다는 풍수담이자 지명 유래담을 갖고 있다.
뱀은 풀을 벗어나면 위태롭다. 풀을 상징하는 나무들을 객사 뒤에 심어 숲을 조성했고, 또 읍성 주변에도 심었다. 경관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숲은 여름에는 바람을 일으켜 시원하게 하고, 겨울에는 북풍한설을 막아준다. 객사 아래 좌우에 2개의 연못을 만들었다. 뱀의 눈을 형상화했다고도 하고, 뱀을 위한 개구리 서식지로 만들었다고도 하였다. 목적은 읍성 안 습도 조절과 화재 발생시 소방수 역할이 목적이었다. 사두봉 뒤 저 멀리 한제산(221m)은 황새산, 읍성 앞 영선중고등학교 작은 언덕은 개구리로 상정하였다. 즉 ‘황새↔뱀↔개구리’ 셋이 서로를 견제하는 삼수부동격(三獸不動格)으로 지관들은 설명하기도 한다. 조선조 공공기관 건물 가운데 뱀머리를 ‘공식화’한 유일한 읍성이다. 전북이 아니라 전국의 ‘인문학적’ 자랑이다.
작가는 이를 작품화했다.
무장읍성 연못은 2015년 발굴조사에서 우물과 함께 발견됐다. 연지 중앙부에는 정자의 기초로 보이는 초석이 발견되었고 연못 안과 밖을 연결하는 나무다리의 흔적이 확인됐다. 지금의 모습은 발굴조서 결과를 토대로 2017년에 복원했다.
일제강점기 교사로 쓰던 과거 무장현 동헌 ‘취백당(翠白堂)’도 최근 산뜻하게 보수됐다.
작가는 마루에 앉아 한동안 취백당 구경에 빠졌다.
취백당은 무장현 관아의 동헌(東軒)으로 고을 원님께서 집무를 보던 건물이다. 취백(翠白)으로 쓰기 이전에는 송사(松沙)라고 썼는데 뜻은 같다. ‘취(翠)’는 소나무처럼 푸르고 늠름한 기상이니 ‘송(松)’이고, ‘백(白)’은 모래처럼 희고 결백한 절조를 나타내니 ‘사(沙)’이다. 고을의 원으로서 청렴결백하게 백성을 돌보라는 뜻도 들어있다.
‘무장읍지(茂長邑誌)’ 성곽조에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1417년 병마사 김저래(金著來) 때 읍성을 쌓고 동헌과 관사를 세웠는데, 2월에 시작하여 5월에 끝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헌의 대청마루에 앉아서 또 한 번 휴식을 취해보면서 하늘도 보았다. 역시 이곳도 탁 트인 시야가 오후의 더위를 살짝 식혀주는 것 같아 앵글에 담았다.
작가는 "무장읍성은 뜻깊은 전설을 간직한 사두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뱀눈에 해당하는 곳에 각각 연지를 간직하고 있으며 동남벽은 석성이고 서북벽은 토성으로 감싸 안고 있다"면서 "더욱이 읍취루에서 비석군까지 넓은 잔디밭이 있고 그 중심에 무장읍성의 객사인 송사지관 이 있어 행사때 저절로 무대가 형성된다. 송사지관 앞 넓은 잔디 광장에서 왠만한 행사는 다 치를 수 있다"고 했다.
무장읍성이 갖고 있는 장점들을 계속 찿아내고 앞으로 잘 보존하고 가꾼다면 전국적으로 세계의 문화유산으로써 크게 활용될 수 있으리라 본다면서 바로 이같은 내용들을 사진에 고스란히 담았다고 덧붙였다.
작가는 고창 무장 출신으로 전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역사철학)를 졸업, 2000년 극사실주의 화가 이상원선생의 ‘동해인’ 연작 시리즈를 보고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부터 완주의 향토기록 사진을 수집 촬영하고 있다. 지난 2013년엔 안남사진갤러리를, 2023년엔 황재남 사진갤러리 ‘포시즌’을 개관했다. 산악 사진- 지리산 사진 전문가 박환윤선생에게 사사, 한국사진작가협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완주의 산성’과 ‘완주 가야 봉화대의 발견’ '지리산' 등 전시를 가졌다.
현재 완주마실문화아카이브를 운영, 완주 마을 생활 문화 역사 경관을 소개하고 있는 가운데 고산면지, 비봉면지, 운주면지, 장수 천천면지 집필 위원 등을 역임했다.
대아호와 함께한 생활 문화 경관, 안남 마을 사람들, 완주 마실 이야기, 대아호의 사계, 완주 100경, 안남 마을 사람들의 옛 추억 등 많은 크고 작은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대한민국 사진대전, 전라북도 사진대전 전북회원전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10일 고창 무장읍성에서 가족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무장읍성 축제’가 열린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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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5-09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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