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4월 06일 14시17분
[메아리]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결혼식
SNS로 인연이 되어 알고 지내는 분이 고맙게도 자신이 주관하는 문화행사에 종종 초대해 준다. 행사가 주로 서울에서 열리기에 참석은 못 했지만, 이번에는 군산 문화 답사 프로그램이기에 시간을 내었다. 사실, 집에서 가까운 도시라서 군산에는 몇 차례 가 보았다. 그동안 주로 가 본 곳은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수탈과 저항의 흔적을 관광코스로써 보여주는 곳들이었기에 오늘 일정도 역시나 그런 곳들이려니 생각하고 따라나선 길이었다.
모임을 안내하는 가이드분의 포스가 남달랐다. 조경을 전공한 분으로 조선 5대 궁의 해설사로 일하고 있는, 큰 키에 백발이 성성한 분이었다. 최고의 해설사답게 기계적으로 습득한 지식이 아닌 체화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난 몇 개월간의 타는 갈증을 씻겨주려는 듯 대지를 적시는 산뜻한 빗속에 도시 속 은파호수 답사와 옥구향교 답사를 마치고 하제마을 팽나무로 향했다.
미군 부대와 인접한 외진 곳, 팽나무가 있는 벌판으로 들어서는 길에 버스 2대와 여러 대의 차량이 서 있었다. 가이드분이 “이렇게 단체 관광객이 오는 곳이 아닌데.”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알고 보니 그 버스들은 결혼식 하객들을 실은 버스였다. ‘군산 평화바람’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는 활동가 한 분의 결혼식이 팽나무 아래에서 치러진 것이다. 우리 일행은 결혼식 음식으로 쓰인 떡과 과일을 받아 들고 신혼부부의 앞날을 축하해 주었다.
수령이 600여 년인 하제마을 팽나무는 작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군산 지역의 역사와 생태를 연구하는 양광희 씨가 펴낸 ‘600년 팽나무를 통해 본 하제마을 이야기’는 이 나무가 전라북도 기념물을 거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무의인도’라는 섬이었던 하제마을이 육지로 편입된 것은 일제 강점기 간척 사업의 결과였다. 조선인의 피와 땀의 결과로 만들어진 방조제 안쪽으로 ‘불이옥구농장’이 만들어지고 조선인들이 소작농으로 부려진 이 간척지는 쌀 수탈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섬이었을 때는 배를 묶어 두는 나무로 사용되었던 하제마을 팽나무는 간척 이후 내륙으로 자리 잡았다. 해방 이후 하제마을은 ‘노랑조개’ 덕분에 큰 호황기를 누렸다.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라는 농담이 돌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성했던 마을의 쇠퇴는 2000년대 이후 미군 기지의 탄약고 확장이 계기가 되었다. 2002년 국방부의 ‘하제마을 군부대 수용’과 2006년 새만금방조제 물막이공사 완료로 인한 ‘어항 지정 해제’는 마을의 급속한 해체를 불러왔다.
1970년대 인구가 3천 명에 달했던 하제마을은, 어항 지정 해제로 생업을 잃은 주민들이 떠나면서 이젠 황폐해졌다. 조선 시대부터 그곳에 살아왔던 팽나무만이 남아 마을의 지난 역사를 그리워하고 있다. 묶어둔 뱃줄에 쓸린 상처가 민족의 아픔처럼 팽나무에 켜켜이 아로새겨져 남은 주름이 애처롭다. 미군 부대가 마을을 수용하면 팽나무를 제일 먼저 벨 것이기에 활동가들은 팽나무를 지키기 위해 천연기념물 지정에 열정을 바쳤다.
지금도 매달 1번씩 ‘군산 평화바람’은 팽나무 아래에서 반전 평화와 생태 보존을 위한 ‘팽팽문화제’를 연다고 한다. 봄날 나들이에서 우연히 활동가 한 분의 결혼식을 접하면서 최고의 지성을 가졌다고 자만감에 차 있는 우리가 지켜야 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인생의 대부분을 바친 공직생활의 마무리가 멀지 않았다. 퇴직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그냥 놀고 싶다는 말에 선배들은 “6개월만 놀아봐라. 그런 생각 싹 없어질 거다.”라고 조언한다. 퇴직하고도 다들 일을 놓지 않으려고 하니 그게 보편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글쎄. 모르겠다. 어떤 일이 되었건 가치 있는 일에 나의 인생 후반부를 투자하고 싶다. 평생 농업 연구직 공무원으로 살아왔지만, 농업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될까? 이 칼럼 보내놓고 텃밭에 감자 심으러 나가야겠다.
/국립농업과학원 박진우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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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4-07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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