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황희 정승의 뜻을 이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공훈을 쌓아 위상을 높인 후손들
27회. 황희의 아들과 후손
사진 황희의 첫째 아들 황치신 신도비와 묘소. /자료 출처: 두산백과 두피디아
황희의 첫째 부인은 판사복시사 최안의 딸 정경부인 최씨로 딸 하나를 두었으나 황희가 24세 때 별세하고 2년 뒤 공조 전서를 지낸 양진의 딸 청주 양씨와 결혼해 3남 1녀를 두었다.
최씨 부인의 딸은 교동 현감 서달에게 양씨 부인의 딸은 강화 도호부사 기질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남녀 모두 합해 69명이었다.
장수황씨의 조선조 과거급제자는 문과에 45명, 무과에 16명, 사마시에 98명, 의과에 1명으로 모두 160명이다.
1397년(태조 6년)에 태어난 황희의 장남 황치신은 어려서부터 영특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장성할수록 학업에 열중해 태종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태종은 학문에 전념하는 치신을 크게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동(董)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426년(세종 8년) 형조 도관정랑(정5품)으로 지낼 때 일이다. 어느 세도가 집에서 양민들을 노비로 만들어 차지했다는 송사를 50여 년이나 끌면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치신은 그 일을 한 달도 되지 않아 판결하고 모두 양인으로 환원시켜 주자 아버지 황희처럼 정사를 잘 처리한다며 칭송받았다.
세종도 그가 옳고 그른 것을 잘 판결하고 분란이 없는 것을 좋게 평가하면서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1457년(세조 3년) 충청도 병마절제사에 임명됐을 때는 사병들을 잘 통솔하고 아껴주었으며 억울한 사람이 없게 형벌을 잘 다스려서 명장으로서의 위상을 떨쳤다.
5품 이상의 고위 관료 자제들에게 주어지는 음직으로 벼슬을 시작해 문과에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높은 벼슬을 지냈고 결의가 한결같이 변함없고 성실해서 덕망이 높았다.
1484년(성종 15년) 향년 88세로 별세하자 성종은 매우 슬퍼하며 이틀간 조회를 열지 않고 신하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 지내게 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승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9명의 아들 중 다섯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우의정에 추증되니 공훈을 쌓는 가문의 대를 이었다.
둘째 황보신은 1401년(태종 원년)에 태어나 음직으로 관직에 올라 사헌부 감찰, 호조 정랑(호조에 속한 정5품 벼슬), 종실의 관청 문서를 맡아보던 종친부전첨직을 역임했으나 41세가 되던 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평소 성품이 어질고 후덕했으며 도량이 넓고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다고 전해진다. 1456년(세조 1년)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한양에 왔다가 동생 집에서 병환으로 향년 56세에 별세했다.
장수황씨 소윤공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4남 2녀를 두었다.
황보신은 황희의 얼자로 알려진 황중생의 ‘동궁전 절도사건’의 공범으로 알려져 있다. 황중생이 동궁전에서 일하면서 금잔과 금띠를 몰래 훔친 양이 20냥(兩)이었다. 의금부에서 추국하자 모두 자백하는 과정에서 금 9냥은 형인 황보신에게 주었다고 실토했다.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던 황보신은 결국 고문에 이기지 못하고 죄를 인정하고 만다. 그런데 사라진 금 9냥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거짓 자백을 했을지도 모른다.
세종은 황희의 아들에게 차마 중죄를 물을 수 없어 황보신에게 곤장 100대와 유배를 보내는 대신으로 재물을 바치게 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78세였던 황희는 죄인을 둔 아버지로서 통감하며 사직을 청했으나 세종은 아들의 일은 별개라며 윤허하지 않았다.
평생 죄인으로 살아갈 아들이 걱정됐던 황희는 죽기 1년 전, 아버지로서 또 한 번 왕에게 장물죄로 파직당한 황보신의 직첩을 돌려주기를 청하는 글을 올린다. 그는 “둘째 아들 황보신이 죄를 범하고 관직이 삭탈 된 지 벌써 11년이 지났습니다. 비록 장물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창고의 재물이 아니며 정황이 애매한데 고문으로 자복했으니, 신이 어찌 하루라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늙은 소가 새끼를 핥아 주는 심정으로 감히 죄를 용서하고 직첩을 돌려주시기를 바라옵니다.”라면서 눈물로 호소했다.
문종은 “황보신의 죄상은 미울지라도 늙은 대신의 아들이므로 무시할 수 없다.”라면서 품계와 관직을 돌려주도록 명했다.
이로써 황희는 자식으로 인해 응어리졌던 한을 풀고 갈 수 있게 되었고 황보신 역시 죽기 전에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셋째 황수신은 1407년(태종 7년)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범상치 않았던 그는 어린 시절 아이들과 놀다가 한 아이가 우물에 빠졌는데 다른 아이들은 놀라서 달아났지만 혼자서 옷을 벗고 우물에 들어가 아이를 건져내 구했다고 한다.
사실을 안 황희는 “남을 구제할 뜻과 어려운 때에 솔선수범하는 재주가 있으니 우리 집에 또 한 명의 정승이 나겠구나.” 하면서 기뻐했다고 한다.
황수신은 효성 또한 지극해서 황희가 장수현으로 귀향 가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와 곁에서 밤낮으로 지키며 봉양했다.
1423년(세종 5년) 사마시에 응시했다가 시관에게 학문이 부진하다는 모욕을 당하자, 분개해서 “한 세상을 건지는 것이 과거만이 아니거늘 평생토록 썩은 선비 될 필요는 없으리라”라는 시를 남기고 과거 시험장을 나왔다. 그 후 과거 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경사를 두루 섭렵하며 학문에 매진했다.

황희의 셋째 아들 황수신 시문집 『나부집』/자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세조 때에 이르러 빛을 발하기 시작한 황수신은 1464년(세조 10년) 우의정에 1466년(세조 12년)에 좌의정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 4월 영의정에 올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승에 올랐으나 아쉽게도 5월에 서거했다. 그의 나이 61세 때였다.
세조는 그의 부음을 듣고 종회와 저자를 3일 동안 폐했고 열성이란 시호를 내렸다. 덕성을 잡고 업을 숭상하는 것을 ‘열(㤠)’이라 하고 상신을 보좌하여 잘 마친 것을 ‘성(成)’이라 했다.
그가 쓴 광한루기에는 “먼 조상 공유는 장수현 출신이다. 고려 명종 때 벼슬이 전중감에 이르렀으나 평소 이의방과 더불어 사이가 좋지 않아 이의방이 정권을 장악하고 공을 해치고자 함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이에 장수현의 현감은 이의방의 뜻에 따라 공을 체포하려고 하니 가족을 거느리고 이 읍으로 이사해서 대대로 살게 되었다…… 우리 가문이 이곳에 살기 백여 년이 되고 묘와 친척들이 다 여기 있어 영원토록 고향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장수와의 깊은 인연을 말해주고 있다.
넷째 황직신은 중앙 군사 조직 오위(五衛)의 사직(정5품 군직) 벼슬을 해서 사직공파라 한다. 그러나 사직공파는 1565년(명종 20년)에 간행된 가정보에는 보이지 않고 1723년(경종 3년)에 간행된 계묘보에 와서야 아들 황삼외와 박추에게 시집간 딸이 있다는 기록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지면 : 2025-04-04 16면
http://sjbnews.com/846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