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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3월 13일 18시29분

[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근거 없는 뜬소문으로 각종 비리에 휩싸여 오명을 남기게 된 황희

24회. 유언비어에 시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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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방촌 황희 기념관 내에 있는 황희 연보



지위가 높아질수록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유언비어와 비판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다. 그로 인해 거짓이 진실처럼 둔갑하기도 하고 사소한 일조차 눈덩이처럼 부풀려진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진실이 아닌 오해로 큰 사건이 되고 당사자의 약점으로 작용한다.

황희 또한 오랜 세월 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기에 근거 없는 뜬소문과 주변인들의 시기 질투를 감내해야만 했다.



황희를 향한 유언비어는 이호문이 쓴 사평에도 좋지 않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세종실록》 1428년(세종 10년) 6월 25일 기사를 보면 “희는 판강릉부사 황군서의 얼자로 대사헌으로 있을 때, 설우가 준 금을 뇌물로 받아 당시 사람들이 ‘황금 대사헌’이라고 불렀다.”라고 적었다. 또 “친구 박포의 아내가 종과 간통을 저지른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니 그를 살해하고 도망쳐 나와 황희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황희와도 간통을 저질렀다.”라고 고발했다.

거기다 황희가 “장인 양진에게서 노비 3명을 물려받은 것이 전부인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논밭 근처에 흩어져 사는 노비들이 많았고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을 하고 죄인에게 뇌물을 받고 형벌을 줄여주었다.”라고도 적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황희는 심술이 많고 자기에게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몰래 헐뜯었다.”라고 했다.



이 말들이 다 사실이라면 지도자로서 황희의 품격은 최하위이며 공명정대함도 청렴함도 모두 다 거짓이 되고 만다.

우리가 알고 있던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 황희가 설우에게 금을 받아 ‘황금 대사헌’이란 별명이 붙었고 살인을 저지른 친구 박포의 아내를 숨겨준 것도 모자라 그녀와 간통까지 저질렀다니, 거기다 노비로 부리는 자가 많았고 정권을 잡은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하고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성격은 또 어떤가. 심술은 많고 심기를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중상모략했다니 놀랍고도 어처구니가 없다.





방촌 황희 시문집(1935년) --->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행스럽게도 황희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있어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세종실록》을 편찬할 당시 지춘추관사 정인지가 “내가 듣지 못한 것이다. 감정에 지나치고 근거가 없는 내용”이라며 이에 대한 사건들의 사실 여부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편찬 회의에 참여했던 9명은 황희가 정실의 아들이 아니라고 했던 말은 들은 적이 있으나 그 밖의 일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허후는 “나의 아버지(허조)께서는 매양 황상을 칭찬하고 흠모하면서 존경하였다. 그런 황상이 남몰래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아먹고 옥사에 뇌물을 받아서 재물을 모으고 노비가 많았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또 김익정이 황희와 더불어 서로 잇달아서 대사헌이 되자 모두 설우의 금을 받았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이 ‘황금 대사헌’이라고 일컬었다고 하는데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8, 9인은 어찌 한 사람도 들은 적이 없는가? 이호문은 나의 친족이나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며 단정치 못하므로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이를 삭제함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성삼문은 “이호문의 사초(史草)를 살펴보건대, 오랫동안 먼지에 묻히어 종이 빛이 다 누렇고 오직 이 한 장만이 깨끗하고 희어서 같지 아니한데, 그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나중에 쓴 것이 분명하니, 삭제한들 무엇이 나쁘겠는가?”라며 찬성했다.

그러자 최항·정창손은 “이것은 명백한 일이니 삭제하여도 무방하지만, 한 번 그 실마리를 열어 놓으면 끝에 가서는 막기 어려우니 경솔히 고칠 수 없다.”라면서 근거 없는 소문임을 인정하면서도 실록의 객관성을 위해서 삭제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 이호문의 사평은 그대로 두기로 결정됐다. 대신 근거 없는 내용이었음을 논의했던 기록 또한 남겨두어 황희의 억울한 평판과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았다.



그렇다면 왜 이호문은 황희를 모함했을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어느 날 어전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관료들이 왕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관이었던 이호문이 잠깐 졸았다고 한다. 이를 본 황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호문을 크게 꾸짖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앙심을 품었던 이호문이 황희에 관한 뜬소문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기록했다는 것이다.

평소 이호문은 인품이나 관직 생활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고 이천부사로 재직할 당시 관기와 처녀를 희롱하고 관비를 간통했으며 쌀을 사고팔면서 남의 물건이나 명의를 몰래 쓰는 것이 드러나 파면된 자로 그의 말은 더욱 신뢰할 수 없었다.



황희를 향한 풍문은 황희의 졸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록을 보면 처의 형제인 양수와 양치가 법을 어긴 일이 발각되자 떠도는 소문일 뿐이라고 변명하며 구해줬고 관청에서 몰수한 아들 황치신의 과전을 바꾸어 달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또 황중생이란 사람을 서자로 삼아서 집안에 드나들게 했다가 후에 황중생이 죽을죄를 범하니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발뺌하여 황중생이 조중생으로 성을 바꾸니 애석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처가 식구의 범죄를 덮으려고 청탁하고 아들의 재산을 돌려주려 했다는 내용은 마음만 먹는다면 영의정이었던 황희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누가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위의 기록만으로 황희가 지위를 이용해 압력을 가하고 청탁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충분히 오해할 소지는 있겠지만 심증만으로 황희의 죄를 판가름할 수는 없다.



또 황중생이란 사람을 서자로 삼았다가 죄를 범하니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말해 결국 황중생이 성을 ‘조’로 바꾸었다는 기록이다. 이 내용은 《세종실록》 1440년(세종 22년) 10월 12일 ‘황희의 아들 황중생의 절도에 대해 국문하다’라는 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기록을 살펴보면 영의정 황희가 내섬시의 여종을 첩으로 삼아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황중생이었다고 한다. 황중생이 동궁전에서 시중드는 일을 할 때 여러 번 금품을 훔친 사실이 드러났고 죄를 묻는 과정에서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황희가 부정했다는 것이다.



공명정대함으로 청렴한 삶을 살아왔던 황희에게 서자였거나 양아들이었거나 아니면 아들처럼 대했던 노비였을지도 모를 황중생의 절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오명으로 남았다. 혈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적인 감정에 흔들렸던 황희의 모습은 누구나 거부하기 힘든 시험대가 아닐까 싶다./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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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3-1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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