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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2월 27일 15시04분

[박용근의 황희 리더십의 비밀]국가 의례에 있어 사치를 막고 절차를 간소화해 국가 재정을 절감하다

22회. 허례허식을 금한 검소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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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종묘제례 제수 준비---> 자료 출처: 국가유산청



황희의 청렴함은 국가 재정을 절감하고 사치를 막기 위한 노력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예를 갖추고 정갈함을 지니는 것이 당연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화려함과 부귀함을 자랑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1446년(세종 28년) 1월 23일, 황희는 “검소를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하는 일은 정치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고 임금께 아뢰면서 관료들이 야인들을 따라 흉배(胸背)를 착용하여 화려함을 다투고 부귀함을 자랑하는 것의 폐단을 비판했다.

이어 정치를 할 때는 검소하고 사치를 금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조정의 의식은 존중하되 사치스러운 흉배는 금지해야 한다고 진언해 허락받았다. 흉배는 관복의 가슴과 등에 장식한 화려한 표장으로 부를 과시하려는 사치 풍조가 생겨나고 있음을 우려해 반대한 것이다.



그는 국가 의례에서도 사치를 막고 절차를 간소화해서 국가 재정이 새는 것을 막는 한편, 확보된 국고는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하고 복지를 확대하는 곳에 썼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왕실 제사는 조상에 대한 제사로 효를 실천했던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다. 또한 최고 권력자인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정치적 행위로서 화려함이 더할수록 막대한 재정이 지출됐고 이 모든 경비는 백성들이 부담했다.

후대로 이어질수록 왕실 제사는 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특히 왕릉이 증가할수록 제향은 더 늘어갈 게 뻔했다. 황희는 “소선을 쓰면 제사 비용이 줄어들어 국조가 3백 년은 더 연장될 것입니다.”라고 했을 만큼 제사 비용의 사치가 얼마나 큰가를 일깨웠다.

미래 상황까지 예측한 황희는 왕실 제사에 쓰이는 경비와 공물을 줄이고자 고기를 사용하지 않고 나물 등을 올리는 간소한 소선으로 제향을 올릴 것을 청해 백성들의 부담을 줄인 것이다.

고기를 쓰지 않는 것만으로 과연 경비를 줄이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을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농업국가였던 조선에서 농사를 짓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소를 백성들로부터 빼앗아 간다는 것은 곧 생업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았다. 그 수가 수천 마리에 달했고 돼지, 노루, 사슴, 양, 기러기, 오리 등을 더한 것도 모자라 최상품의 온갖 공물까지 공수해야 했으니, 백성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진2. 종묘제례---> 자료 출처: 국가유산청



사적인 삶에서도 검소함을 실천해 왔던 황희는 자신의 장례에 있어 유서를 통해 자손들에게 이르는 말을 남겼다.

《문종실록》 1452년(문종 2년) 2월 8일 황희의 졸기 기사이다.



“내가 죽은 후에는 상장(喪葬)의 예절은 한결같이 『가례(家禮)』에 의거하되, 본토(本土)에서 시행하기 어려운 일을 억지로 따라 할 필요는 없다. 능력과 분수의 미치는 대로 집의 형세에 따라 알맞게 할 뿐이며, 허식의 일은 일체 행하지 말라. 가례의 음식에 관한 절차는 질병을 초래할까 염려되니, 존장(尊長)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억지로 죽을 먹도록 하라. 이미 시행한 가법(家法)에 따라 불사는 행하지 말고, 빈소에 있은 지 7일 동안은 요전(澆奠 산속에 차려놓은 제물) 하는 것은 『가례』에 없는 바인데, 부처에게 아첨하는 사람이 꾀를 내어 사사로이 하는 것이니 행할 수 없다.”



유서에는 장례의 예절은 『가례』에 의거하되 허식의 일은 일절 행하지 말라고 했다. 『가례』는 송나라 학자 주희가 관혼상제 예절을 엮은 책으로 조선시대 생활의 바탕이 되었으나 중국과 풍속이나 관념이 달라서 시행상 문제가 많았다. 그러므로 억지로 따라 할 필요는 없으며 형편에 맞춰 알맞게 하라고 이른다.

또한 질병을 초래할까 염려되니 문상객들에게 죽을 먹이도록 하는데 실상은 가난한 살림에 무리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다.

황희가 근본으로 삼았던 예의 이념이 잘 드러난 유서에는 예를 갖추되 허례허식을 경계했고 불교를 배척하면서 형편에 맞게 장례 지낼 것을 당부하고 있다.



남편의 검소한 삶에 부인 청주 양씨(楊氏)도 빼놓을 수 없다. 세종 때 왕비의 초청으로 조정대신 부인들이 궁에 모이게 되었다. 한껏 화려한 모습으로 치장한 부인 중에 가장 초라한 옷차림으로 참석한 양씨 부인을 보고 왕비도 뉘우치며 부인들에게 본받으라며 당부했다고 한다.

또 어느 여름날 삼정승과 육판서 부인들이 친목과 피서를 즐기기 위해 모였는데 양씨 부인이 시어머니의 무명 치마와 짚신을 신고 보리밥에 풋고추, 된장을 삼베 보자기에 싸 온 도시락을 보고는 모두가 놀라워했다. 이것은 부인들의 검소함을 바라는 마음에서 황희가 시킨 일이라고 한다.

당시 부인들이 집에 숨겨둔 보물은 없는지 묻자, 양씨 부인은 보배는 없고 보배 축에 드는 아들 셋은 있다면서 좌중을 웃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들을 교육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남 황치신이 호조판서로 있을 때 집을 새로 짓고 손님들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다.

아들의 크고 화려한 집을 본 황희는 “내가 물려준 재산이 없는데 무슨 돈으로 이런 집을 장만했느냐”고 크게 꾸짖고 화를 내며 돌아갔다. 이에 아들은 즉시 집의 구조를 고치고 아버지의 검소한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1477년(성종 8년) 관직에 있던 이칙은 성종에게 “세종조에 황희는 정승 노릇을 30년간 하였지만 가산을 돌보지 아니하여 그 집이 텅 비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종친과 재상이 사는 집을 사치스럽게 하고 강가에 정자를 지어서 놀고 잔치하는 장소로 삼고 있으니 이게 옳겠습니까?”라고 아뢰면서 이를 금지해야 한다며 황희의 청렴함을 다시금 일깨웠다.



후손들도 검소함을 이어받아 재물을 탐하지 않다 보니 황희의 집터는 폐허가 되었고 무덤을 돌보는 사람도 없게 되었다.

1799년(정조 23년) 이를 안타깝게 여긴 경기관찰사 서정수는 “익성공 황희의 무덤을 쓴 산이 파주 오리곶면에 있는데 지금 그 후손이 매우 가난하여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 허술하고 무덤을 지키는 종 하나로는 사람들이 산의 나무를 잘라가는 것조차 막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렸다.

이에 정조는 황희의 후손들이 무덤을 돌볼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지방관을 엄중히 훈계해서 옛날의 어진 이를 추모 하는 것에 소홀함이 없게 하라고 명했다.

/박용근(전북특별자치도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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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2-2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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