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5년 02월 06일 15시05분
[전북의 창]1914년 임실 청웅면에 살던 무명(無名) 훈장의 한탄!
정씨 훈장은 홍진사(洪進士)의 서당에 제술지사(製述之師)로 초빙되었다. 당시 홍진사는 1894년에 입격한 홍한섭으로 추정된다. 그의 묘비에 “나이 칠십이 넘어서도 과거의 뜻을 버리지 않았으니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라도 영화를 남겨드리고자 한 것이다. 갑오년 봄에 진사시에 입격하여 기로(耆老)로 은전을 입어 돈녕부 도정에 제수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5월 29일 일기에 따르면, 정씨 훈장은 경자년 12월 23일에 창평현 장북면 대방리에서 태어났다. 8~9세에 남원 아산방 사곡(沙哭)이라는 곳으로 와서 10여 년 살았다. 다시 초랑방 사랑리(紗浪里)로 옮겨가서 20여 년간 살았는데 가산 일체를 탕진하게 되어 농짝 하나에 의지하여 영계방 관전리(官田里)으로 옮겨, 수 십 년을 살았다. 그러다가 1913년 3월 23일 임실현 옥전면 청계리 즉 두만산 아래로 옮겼다고 한다. 이런 내용으로 미루어 대략 1840년생으로 1914년 당시 75세가 된다. 일기에는 일기에 자신의 이름은 쓰지 않아서 ‘정씨 훈장’이라고 하였다.
그는 홍진사댁 서당에서 임실, 전주 등지에서 찾아온 10대 학동들을 가르쳤다. 보통 서당 교육은 강학(講學), 제술(製述), 습자(習字)로 이어지는데 정씨 훈장은 시를 짓거나 부를 짓는 등 글짓기를 주로 가르쳤을 것이다. 일기에는 구초중말자(句初中末字)로 문답하는 놀이[問答之戱], 과시(課詩) 경쟁을 통한 장원례(壯元禮), 백수문(白首文; 천자문) 환권례(換卷例) 등 여러 가지 공부법이 소개되어 있다. 1910년대 서당교육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1914년 8월 10일 일기에는 서당에 방문한 노인과 만난 후에 기록한 ‘나라가 전복되는 조짐’이란 글을 썼다. 임실에서 이름을 남기지 않는 훈장이 짚어낸 ‘나라가 망하는 조짐’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세도(世道)의 폐해, 장관(長官)의 부패, 과거(科擧) 제도의 폐단, 양반(兩班)의 폐단, 조세(漕稅)의 폐단을 거론하였다.
그가 거론한 다섯 가지 폐단은 19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던 개혁의 대상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에 잘 드러나듯이 신분제 철폐, 조세제도 개혁, 탐관오리 징치, 문벌 타파, 토지평균 분작 등등.
이러한 ‘나라가 전복되는 조짐’으로 1910년 조선은 망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강제 병합으로, 1392년 개국한 이래 519년 존속한 왕조가 무너진 것이다.
조선의 망국은 국제적인 사안이었다. 조선 멸망을 중국의 반면교사로 삼고자 지속적인 정보를 수집한 중국의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제시한 , 는 주목할 만하다.
양계초는 중국의 유신파 계몽주의 지식의 대표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그가 1910년 9월에 발표한 에서 첫 번째로 꼽은 최대 원인은 ‘궁정(宮庭)’이었다. ‘위로는 생부(生父)에게 휘둘리고 안으로는 부인에게 견제를 받고, 아래로는 귀척(貴戚)과 호족들에게 위협을 받고 좌우 근신들에게 현혹되었다.’라고 진단하였다.
즉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과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주도하면서 결두전이니 원납전과 같은 여러 명목으로 잔혹하게 착취하였고, 민비[명성황후 추존]가 제멋대로 정사에 임하는 사이 민씨 중에 백만금 이상 모아 집안을 일으킨 이가 10여 명이나 되었으며, 김씨, 조씨, 양씨도 이보다 더하지 않았다고 평하였다.
궁정 내의 만연된 부패와 정치의 부재로, ‘양반이라는 자들이 나라의 정치, 사회, 생계상의 세력을 모두 농단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양반이 아니면 관리가 될 수 없고, 양반이 아니면 학업에 종사할 수 없으며, 양반이 아니면 재산도 안전하게 지킬 수 없는...... 조선국 내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독립 인격을 가진 자는 오직 양반뿐’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문제가 첩첩으로 쌓여 그 부담은 그대로 농민들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농민들은 1년 내내 부지런히 일하여도 먹을 것을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은 이러한 이유로 망한 것이지 일본이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고 진단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양계초가 1910년 9월에 발표한 에도 잘 드러난다. 그는 1876년부터 1910년까지 약 30여 년간의 병탄과정에 대해 기술하였는데, “조선이 스스로 망하지 않는다면 망하게 할 수 있는 자는 없다.”라고 논평하였다. 스스로 망하고자 하지 않으면 망할 수 없는 나라, 을사년의 대한민국의 모습이길 바랄 뿐이다.
/김철배(문학박사, 임실군청 문화유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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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 : 2025-02-07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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