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작성: 이종근 - 2025년 01월 22일 15시36분
[금요수필]골목의 정
박경숙어릴 적 어머니께서는 골목이 훤히 보이는 곳에 빨랫줄을 매고 빨래를 널 곤하셨다. 빨랫줄에는 햇살이 탐스럽게 피어나고 빨래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말라갔다. 그 빨래가 말라 갈쯤 어머니는 저녁 찬거리를 사러 시장에 나가셨다. 앞집 창문에서는 어김없이 비틀스의 노래가 흘렀다.
우리 집 건너편에는 순옥이네와 욕쟁이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순옥이 할머니는 종종 골목 끝에 기대어 앉아 꾸벅꾸벅 졸곤 하셨다. 할머니가 낮잠에서 깨어날 때 신작로 쪽에서 구멍가게 막내아들 영철이가 라면땅을 들고 걸어오는 게 보인다. 우리 집은 비틀스와 순옥이, 영철이가 아무 때나 불쑥 나타나는 골목의 세 번째 집이었다.
골목에서 영희네는 방앗간을 했다. 나는 매일 말랑말랑한 인절미를 먹을 수 있는 영희가 부러웠다. 명절날이 다가오면 영희네 집 앞에는 떡방아를 찧으려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영희는 방앗간 입구까지 줄지어 서 있는 함지박 중에서 내 것을 맨 앞자리에 놓아주고는 했다. 그때 영희에게 인절미를 얻어먹을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소녀였다.
골목에는 작은 제과점도 있었다. 아들만 셋인 그 집은 동네 총각들의 아지트였다. 그래서 비틀스니, 알톤 존이니, 하는 팝 아티스트들의 노래가 수시로 그 집을 들락거렸다. 그러면 연탄재가 수북한 골목은 때아닌 음악 공연장이 되곤 했다. 골목에 음악이 흐르면 동네 언니들은 방앗간 집 옥상에 모여 앉아 제과점 아들 중에 누구 인물이 제일이고, 뉘 집 새댁이 아들을 낳았다느니 하며 얘기꽃을 피웠다. 그러다 미원 탑 사거리에 있는 아카데미 극장에 나훈아가 뜬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줄줄이 극장으로 떠났다.
햇살은 내가 사춘기 무렵에도 꼬박꼬박 찾아들었다. 하늘은 높고 별빛이 선명한 어느 가을날, 나는 버스 안에서 쪽지를 받았다. 골목 끝에 있는 공터로 나오라는 쪽지였다. 나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공터로 나갔다. 우리는 담벼락에 나란히 기대어 서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그는 별을 함께 볼 수 있는 건 참 좋은 일이라고 했다. 나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나지막이 읊었다.
욕쟁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인사처럼 음악이 흘렀다. 세월이 흘러 골목에는 바람 같은 사연이 숱하게 스쳐 지나가고 햇살은 어김없이 잊지 않고 찾아들었다. 사람들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하겠지만,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며 그곳을 지켰다. 하지만 아카데미 극장이 문을 닫고부터 나훈아 공연 소식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영철이네가 이사 가고 라면땅도 사라졌다. 연탄재마저 사라져 버린 그 골목에는 어느덧 개발 붐이 일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변했다. 햇살이 보드라운 오후.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말라 가고 있다. 이제라도 그 골목을 찾아가면 낡은 레코드판이 삑삑 소리를 낼 것 같고…. 욕쟁이 할머니가 앉았던 자리에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햇살이 비출 것만 같다.
박경숙 수필가는
전주 출생. 2016년 '계간수필'에서 수필 추천 완료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행촌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집'미용실에 가는 여자'
2021년 전북수필문학상 수상. 2022년 산호문학상 수상
전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역임
현재 전북문인협회 이사
전북을 바꾸는 힘! 새전북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지면 : 2025-01-24 7면
http://sjbnews.com/839544